매일신문

미주 이민 100년의 숨결-한인회 활동

멕시코 유카탄 이민 한인의 후손들 가운데 비록 더듬거리지만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텔마 이(이덕순.83.여)씨는 '올드 랭 사인' 곡에 가사를 붙인 애국가를 4절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의 집 거실 벽에는 한복을 입은 여인 사진이 있는 달력과 한글로 '한국인'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고, 곳곳에 한국 관련 소품들이 장식돼 있어 조국사랑을 느끼게 한다.

이씨는 '1910년 전후의 한인들은 애니깽 농장 등 일터에서 한국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으며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조국 걱정과 독립운동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아들인 메리다 한인회 율리세스 박 이(63) 회장이 취재팀을 안내한 곳은 메리다 구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한 옛 한인회관. 이 곳은 전세살이를 하던 한인회가 1931년 직접 건립한 건물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퇴색한 단층 석조건물의 목재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20평 크기의 실내에는 지난 60년대에 무단 점유했다는 유카테코(마야족 원주민) 일가족 9명이 간단하고 허름한 살림도구를 갖춰놓고 궁핍하게 살고 있었다.

율리세스씨는 '한인회 활동이 중단된 1958~59년까지 한인회관과 재미 항일단체인 국민회 산하 메리다지방회 사무실로 쓰이면서 1955년 이민 5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던 곳'이라며 '오는 2005년 이민 100주년을 대비, 건물을 매입해 복원할 계획인데 거주자가 시세의 3배가 넘는 2만달러를 요구, 자금이 부족해 난감한 실정'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메리다 한인회는 애니깽농장 계약노동 만료 사흘 전인 1909년 5월9일 창립했다.

재미 국민회가 혹사당하는 멕시코 한인들의 미국 이민을 추진하다 실패하자 이근영 등 구한말 광무군 출신 이민자 8명의 협조로 국민회 메리다지방회로 출범시켰던 것. 창립회원은 당시 메리다 거주 한인의 절반에 가까운 314명이었고 한달 뒤 404명으로 늘어났다.

'한인회는 단순 민간단체가 아니다.

채찍과 굶주림, 무더위 등 온갖 고통을 견뎌내 애니깽농장 노예생활에서 해방됐으나 돌아갈 조국이 없어 방황했던 유카탄 일대 한인들을 결속시키는 정신적 안식처였고 조국독립의 의지를 북돋운 구심점이었다.

멕시코 주재 일본영사관 배척과 한인권익 보호, 교민간 상부상조 등을 통해 한인들에게서 망명정부와 같은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율리세스씨의 설명이다.

김기창 이종오 등의 지도자가 활약한 메리다 한인사회는 1909년 11월17일 을사조약 국치 4주년을 맞아 일본을 규탄하는 대대적인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날 미국내 한인보다 2년여 앞선 1908년 7월부터 매일 밤 짬을 내 군사훈련을 받았던 한인청년 및 광무군 출신자 110명은 무장을 하고 시가행진도 펼쳤다.

군사훈련을 주도했던 이근영은 1909년 10월 무력배양을 통한 항일운동을 위해 숭무(崇武)학교를 세워 한인들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면서 1913년 3월 멕시코 혁명정부가 사조직 금지령을 내릴 때까지 운영했다.

특히 그는 광무군 출신 30~40명과 함께 1916년 망명정부 '신조선'을 건설하기 위해 건립자금과 영토를 받는 조건으로 과테말라 지하혁명군에 적극 가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혁명군이 과테말라 독재정부 축출에 실패하는 바람에 '동포를 총알받이 용병으로 팔아먹었다'는 오명만 뒤집어쓰고 있어 역사적 재조명이 요구된다는 게 한인 후손들의 지적이다.

메리다의 한인 여성들은 고국의 3.1 만세운동에 고무돼 1919년 4월 대한여자애국단(대한부인애국회)을 결성, 독립자금과 조국난민 구제의연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한인들은 1910~20년대 멕시코정부와 현지인의 동양인 탄압 때문에 정처없는 떠돌이생활과 잡역부나 냄비 땜장이 등 천한 일을 하면서도 멕시코시티 등 가는 곳마다 메리다처럼 국민회지방회와 한글학교를 세워 고국역사와 문화를 가르쳤다.

이와 함께 지방회에 법무원을, 마을이나 직장엔 파출소와 경찰관 성격의 사찰을 두고 동포를 대상으로 법적 권한을 행사하는 자치제를 운영했다.

10여개 지역에 설립된 지방회는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불구, 국민회 운영회비와 임시정부로 보낼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데 열성적이었다 한다.

서동수(66) 전 멕시코시티 한인회장은 '1917~18년 도산 안창호의 멕시코 순회방문과 3.1운동을 계기로 한인들의 조국애는 중남미의 살인적인 땡볕만큼 후끈 달아올랐다'며 '각 지역 한인들은 3.1절과 국민회 및 대한여자애국단 창립일 등을 민족기념일로 정해 매년 시가행진 등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독립정신을 불태웠다'고 밝혔다.

또 3.1운동 직후 일제에 쫓겨 중국 상하이와 유럽을 거쳐 1921년 멕시코로 온 황보영주, 김진숙, 김병모, 김순민, 허영호 등 20여명의 젊은 망명객이 가세하면서 항일의지는 극에 달했다는 것. 한인들은 일본인이 아닌 '대한사람'임을 자처하다 무국적자 신세로 전락,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국민회가 발행한 회원증만 꽉 쥐고 귀화를 거부하며 살았다고 한다.

이들의 나라사랑은 '…문무겸한 건아야/태산양해 겁낼 것 무어냐/애국지사 본밧고/순국열사 되아랴/…대한남녀들아/우리 한데 모혀서/실력양성 큰 목뽀/달하기를 힘쓰세/자유독립 긔초 여기 있다네'라고 노래한 '멕시코시티 한인회 청년회가(1933년)'에 잘 드러나 있다.

메리다에서 강병균기자 kbg@busanilbo.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