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강원도 산골 태백도 고원 휴양도시라 해 호텔과 산장이 들어서고, 3년 전에는 태백 석탄 박물관까지 개관될 정도로 광산촌으로서의 태백에 대한 인상이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50, 60년대 탄광촌의 풍경은 결코 감상적이지 않았다.
당시 태백은 하루가 멀다하고 탄광사고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던 거칠고 살벌한 곳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먹을거리가 풍성한 상가집으로 다니며 끼니를 때우는 일이 신이 났고, 16세가 돼 처음 상여꾼이 되었을 때는 삯으로 받은 광목 한 필로 술집에서 실컷 술을 마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괜히 상여 메기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너무 일찍부터 익숙해져버린 탓인지 죽음 앞에서 태백의 아이들은 쉽게 숙연해지지 못했다.
산간 오지에서의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상여를 처음 메던 16살 이후부터였다.
무거운 상여를 어깨에 메고 막걸리에 반쯤 취한 아찔한 정신으로 상여길을 걸으면서 죽음조차 그저 반복되는 일상의 파편일 뿐이라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의기투합한 친구 둘과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타고, 드디어 집을 떠났을 때가 까까머리 고등학교 1학년. 등록금을 챙기고, 겨울 외투를 팔고, 집안의 비싼 냉면 기계까지 헐값에 팔아가며 모의했던 서울로의 탈출은 싱겁게도 10일도 채 안 돼 끝이 났다.
한 번 터졌던 염증은 얼마 못 가 이내 다시 곪기 시작했다.
우연이었을까. 연극이란 것을 학교 예술제에서 처음 접하게 됐던 것도 바로 그때였다.
수재민 돕기 학교 예술제의 연극 작품에 우연히 출연한 이후 그것이 배우 인생으로서의 계기가 되는 줄도 모르고 알 수 없는 흥분에 싸여 있었는데, 바로 이튿날 어이없게도 형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태백의 반복적 일상에 대한 염증은 형의 죽음 이후 심하게 곪아 터졌다.
스무살의 나이에 특별한 꿈도 희망도 없이 태백을 등지고 다시 한번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어쩌면 형이 마련해 준 차표였는지도 모르겠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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