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에 사는 쿠바 현역 육군 준장 파블로 박(박금손·63)씨는 "특히 1950년을 전후해 한인사회는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으며 일하거나 취업난에 직면해 붕괴 우려 속에 몸살을 앓고 동요했으며, 불이익과 생존권 위협을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의 일환으로 쿠바 시민권을 획득하며 귀화하는 경우가 속출했다"며 "이 시기에도 한인들은 한글교육과 조직활동을 계속하고, 지난 50년 한국정부는 정부를 승인해 준 중남미 14개국에 대한 감사표시로 실시한 친선방문 도중 김동성 특사를 쿠바에 파견하기도 했으나 전반적으로 한인사회의 침체기였다"고 평가했다.
1953년 자료에 따르면 288명으로 시작한 쿠바 한인사회는 카르데나스 148명(남자 75명, 여자 73명), 아바나 106명(남자 51명, 여자 55명), 마탄사스 98명(남자 52명, 여자 46명), 기타지역 40여명 등 400명에 달했다.
1921~53년 32년간 사망자수는 130명(남자 85명, 여자 45명), 출생자는 253명(남자 131명, 여자 122명)으로 수치상 123명이 증가했다.
살기 어려워 멕시코로 돌아간 사람도 50여명(확인된 수는 27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카르데나스 한인들은 애니깽 노동자가 대부분이었고 식품점이나 주점 경영자와 퇴직자도 일부 있었다.
수도인 아바나의 한인 직업은 바늘공장 노동자, 자동차수리업, 세탁업, 음식점·포목점·보석상 종업원, 수도공사 직원, 노동자 등 다양하다.
첫 정착지 마탄사스의 한인들은 보석상 식품점 잡화점 시계점 경영과 보석상 점원, 애니깽 노동자, 잡역부, 퇴직자 등으로 어느 정도 자리잡은 소규모 자영업자도 있었다.
이 무렵 한인들은 같은 혈통의 배우자를 만나기 힘든데다 현지 스페인계 백인과 흑인이 결합한 '물라토' 중심의 혼혈사회에 동화되면서 쿠바인 등 외국인과 결혼하기 일쑤여서 한국계 가정은 다국적 상황을 맞는다.
순수 한인부부 26가구, 혼혈 한인 부부 7가구, 한인 남자+쿠바 여자 16가구, 한인 여자+중국 남자 8가구, 멕시코인 어머니를 둔 한인 여자+외국 남자 4가구, 멕시코 여자 소생의 한인 남자+쿠바 여자 3가구, 한인 여자+쿠바 남자 2가구, 한인 남자+미국 여자 1가구 등으로 복잡했다.
이런 가운데 1959년 스페인계 이민노동자 2세인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전사 체 게바라가 일으킨 중남미 최초의 무력혁명인 쿠바혁명은 위기의 한인사회를 크게 바꿔 놓는 분기점으로 작용한다.
파블로씨는 "쿠바혁명은 러시아 멕시코 볼리비아 등에서 나타난 봉건체제 농민들의 갈등이 아니라 쿠바를 지배한 미국·스페인계와 이에 기생한 매판자본가들의 대토지제도인 '라티푼디아'를 기반으로 한 임금노동제를 개혁해 경제와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며 "혁명정부가 외국인자산 국유화, 외국인과 공공회사의 토지소유 및 소작노동 금지, 개인 토지소유 제한 등 개혁을 단행해 사회주의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고용 등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가난했던 한인들 대부분은 일자리가 늘어나 쿠바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안정을 찾고, 현지동화가 급속화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배용종(호세 빼)의 경우 카르데나스 애니깽농장의 한인들을 규합, 미국의 지원 아래 2차례 집권한 바티스타 정권 타도에 앞장서고 혁명 후 지방공산당 창당요원으로 활약했다고 밝혔다.
특히 현 쿠바한인회장 헤로니모 임 김(임은조·77)씨는 혁명의 기수였다.
1946년 쿠바 최고의 명문 아바나 법대에 진학, 동포사회 최초의 종합대 학생을 배출한 기쁨을 안겨줬던 그는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르고 동창생인 카스트로의 혁명에 뛰어들었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도시게릴라 활동으로 혁명에 크게 기여한 그는 경찰청장 보좌관으로 발탁된 뒤 30여년간 산업부와 식량산업부에서 고위 관료생활을 하다 지난 93년 차관보로 퇴임했다.
이후 2년간 차관급인 동아바나지역 인민위원장을 지내고 아바나 인근 도시 코세호 폴로라스의 시장을 역임하는 등 한인 중 최고위직을 경험했다.
그러나 헤로니모씨는 "혁명은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등 경제적으로 성공한 일부 한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기득권층과 함께 부르주아 반동계급으로 낙인 찍혀 재산을 뺏기거나 강제 망명길에 오르는 수난을 당했다.
조선독립의 원군을 얻기 위해 바티스타 정권의 정책에 협조한 한인들까지 탄압받았다"고 회고했다.
지난 62년 하와이를 거쳐 LA로 간 박창운 현미숙 부부와 66년 미국으로 탈출한 이인상 이옥동 부부, 80년 미국 마이애미로 망명한 마리오 김 등이 '쿠바 엑소더스'의 대표적 한인들이다.
이로써 쿠바 정착 이후 40년 가량 재미 국민회에 정신적으로 의존해 온 한인사회는 크게 허물어지고 지난 61년 쿠바와 수교한 북한의 아바나 주재 대사관이 한인사회와 접촉하는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북한은 재일동포에게 그랬듯이 쿠바의 한인들에게 북한에서 살 것을 제의하기도 해 실제 북한으로 몇 사람이 갔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바나·강병균기자
사진·강선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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