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정부가 출범한지도 벌써 5개월이 됐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첫 페이지에 나오는 '모든 시작은 어렵다'는 유명한 말처럼 참여 정부는 승리의 찬사에 도취될 겨를도 없이 국민적 기대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창조적 파괴'를 해야 한다는 역사적 숙명 때문인가. 기성 정치와 차별화하려는 각종 담론(談論)이 난무하면서 신선한 충격과 더불어 그에따른 불안감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참여 정부는 비교적 선명한 패러다임을 가지고 출발선에 섰다.
◈'법과 원칙'없는 분배정책
'참여'의 명칭에서 보듯 새 정부는 처음부터 '성장'보다는 '분배'에 무게를 둔 다소 획기적인 카드를 들고나왔다.
자본가인 주주의 이익만 챙겨주면 되는 미국식 주주(stockholder)자본주의가 아닌 이해관계자(stakeholder)자본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노동자와 경영자, 채무자와 채권자, 관련 업체들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소위 이해관계자들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지속적인 발전을 할수없다는 유럽식 자본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함께 잘 살아보자'는 철학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이런 훌륭한 담론이 뜻밖의 복병을 만나게 된다.
사회적 형평성을 앞세우면 주인 의식과 참여 의식이 높아져 당연히 생산성 향상으로 연결되는 것이 교과서적 이론인데 우리는 '집단이기주의'로 발전해버렸다.
목소리 높은 쪽에 점수를 주다보니 '법과 원칙'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려났다.
내가 사회에서 왜 필요한 존재인가를 잊어버리고 '돈과 힘'의 노예가 돼 그쪽으로 똘똘 뭉치는 천민(賤民)자본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상류층일수록 국민의 의무인 병역과 납세문제에는 개운찮은 구석이 많은데도 그것이 용인되고 있다.
서민과 젊은층은 빚더미에 올라앉고도 별다른 죄책감없이 '한탕주의' 문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분명 '인간의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를 향해 달려갔는데 어느 새 비인간적이고 짐승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우리 뒤를 바짝 뒤쫓아오고 있으니 정부나 국민이나 모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참여 정부 출발 당시의 패러다임도 많이 퇴색했다.
한국 자본주의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처해있다.
서구 자본주의를 제대로 뿌리내리지못한 나라인데도 50년만에 이렇게 압축 성장한 사례가 없었으며 이제는 19세기 중반 유럽상황과 비슷한 이념적 사상의 먼지를 털고있으니 또 한차례 '성장의 아픔'을 겪어야함은 틀림없다.
문제는 이제까지의 성장이 물질적이었다면 앞으로의 성장은 정신적·이념적 성장이라는 점이다.
어느 쪽이 더 성장통(痛)이 클 것인가. 파이를 키우는 것은 땀만으로 가능하지만 키워놓은 파이를 갈라먹는데 협력과 화해없다면 그야말로 이전투구가 될 것이다.
자칫 '정글의 법칙'이 환생할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차(茶)문화에 초의(草衣)선사를 빼고 얘기할 수 없다.
그는 차를 온전하게 마시는 전범인 다신전(茶神傳)을 썼다.
중국의 다경요채를 참고로 찻잎 따는 시기, 좋은 차 식별법, 차 끓이는 법, 보관하는 법 등을 기술했다.
그러나 초의는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나아가 조선차의 덕을 칭송하는 동다송(東茶頌)을 집필한 것이다.
동다송은 중국의 좋은 차들의 신묘 영묘함을 말한 다음 우리나라 차는 그보다 더 좋은 것임을 노래한 것이다.
◈'성장의 아픔'받아들일 때
'차를 혼자 마시는 것은 가장 잘 마시는 것이고, 둘이서 마시는 것은 그냥 잘 마시는 것이고, 서너명이 마시면 그저 맛을 보는 정도이고, 5~6명이 마시는 것은 제대로 마신다고 할 수없고, 7~8인이 둘러앉아 마시면 차를 보시하는 것이다'라는 초의선사의 주(註)는 압권이다.
이제 한국 자본주의는 '다신전'을 넘어 '동다송'의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소득2만달러 시대는 모방과 복사로는 오를 수 없는 고지다.
남의 모델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이제까지의 성장이 경로 의존적(path-depedent)이었다면 앞으로는 경로 파괴적(path-breaking)인 가시밭길을 가야한다.
아직 7부 능선인데도 올라갈 생각은 않고 퍼질고 앉아 풍류를 즐기다가 해가 빠지면 그냥 하산해버릴 작정인가.
우리나라는 아직도 '성장에 배고픈' 나라다.
따라서 참여 정부는 출발 당시의 초심(初心)에 그렇게 연연할 필요가 없다.
더 큰 '성장의 아픔'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한다.
'한국 모델'은 지금 세계적인 경제 실험무대에 올라있다.
윤주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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