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망대-사람은 왜 고독해야 하는가

말은 물론 소리지만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오래 입에 오르내리다 보면 거기 의미가 생긴다.

말은 그래서 창조의 세계에 속한다.

하늘과 땅도 말이 만들어낸 그 무엇이다.

거기에는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있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심오한 뜻을 간직한 하늘과 땅이 있다.

하늘과 땅에 깃들어있는 모든 것들, 이른바 천지만물이 다 그렇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불러온 말은 하나 둘이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어른이 되어 가정을 가지게 되면 아내니 남편이니 여보니 당신이니 하는 말들이 차츰 귀에 익게 된다.

귀에 익게 된다는 것은 예사롭게 받아넘긴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타성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들은 어느새 그대로 하나씩의 공간을 형성한다.

사람에 따라서 그 크기는 다르겠지만 말이다.

언제가 되면 우리는 말에서 물러나게 될까? 말은 갈수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갈수록 그(말)의 포로가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말하자면 행복이 될까 불행이 될까, 어느 쪽일까? 그러나 말에 몸과 마음이 굳게굳게 묶일수록 사람은 더욱 사람다워진다.

그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사람으로 태어난 숙명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서 이 세상으로 내보냈다.

이 운명을 아무도 거역하지 못한다.

말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조아맨다.

이런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기만 한다.

나는 이에 단념해야 한다.

이 상태로부터 도저히 풀려나지 못 할 것이라는 것을 더욱 절실히 깨달아야 할 것 같다.

나는 때로 눈물겹다.

이제야 사람이 되는구나 하는 실감을 갖게된다.

너무 늦었다는 느낌이 없지도 않다.

나는 지금 한없이 외롭다.

하루해를 넘기기가 태산을 넘는 듯한 느낌이다.

겨웁고도 겨웁다.

이럴 때 또한 말들이 나에게로 온다.

가장 가까이에 오는 말은 '여보'와 '아내'다.

그 다음이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동생의 순이다.

지금은 모두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다.

그들과 그분들이 두고 간 공간이 나날이 커지고 깊어지기만 한다.

그러나 만져볼수도 없고 안아볼수도 없다.

다만 여보! 하는 말 하나가 더욱 견딜 수 없이 내 고막을 때린다.

그 절실한 울림은 여태까지 내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그런 슬픔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 네 곁에서 없어져 보아라. 고독해지면 너는 알게 된다.

무엇이 소중했던가를 그것은 사랑이란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한이란 말이 한층 그 느낌에 가깝다.

왜 그때 그러지 못 했을까, 왜 그때 그랬을까, 지금은 돌이킬 수 없다는 느낌이 새삼 새로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로 돌아온다.

여보! 하는 한 마디 말에는 5천년 한국인의 감정이 압축돼 있다.

그것은 너무 깊고 아득해서 바닥이 보이지 않고 거리를 잴 수가 없다.

사람은 고독해지면 더욱 사람이 되는가보다.

누가 곁에 와서 앉아주기를 절실히 바라게 된다.

그가 누구일까?

여보! 아내를 잃고 나는 우리말에 이렇게도 정답고 아름다운 말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됐다.

여기까지 얘기를 하다보니 내가 쓴 시가 한편 생각난다.

여보, 하는 소리에는

서열이 없다.

서열보다 더 아련하고 더 그윽한

구배(句配)가 있다.

조심조심

나는 발을 디딘다.

아니

발을 놓는다.

〈중략(中略)〉

오지랖에 귀를 묻고

누가 들을라,

사람들은 다 가고 그 소리 울려오는

여보, 하는 그 소리

그 소리 들으면 어디서

낯선 천사 한 분이 나에게로 오는 듯한

〈제1번 비가(悲歌)〉

김춘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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