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병장 김상종 격문 발견

"…국모가 해를 입어 마침내 허위(虛位)로 돌아감에 말하자니 통곡스럽다…. 이에 우리 읍에서 공의(公議)를 크게 발하여 의병을 창도하여 일으켰다.

활쏘고 말모는 것이 서로 어긋나지 않아 비록 드높은 공은 없으나, 방어하고 보위하기를 도모하니 오히려 극진한 충성이 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이 격문이 전달되는 날 기한을 정하여 군대를 떨치고, 소리를 일제히 하여 힘을 합하자…".

구한말 의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김상종(金象鍾) 의병장의 종증손자인 김태덕(68.대구시 수성구 신매동)씨는 조상의 체취가 담긴 격문(檄文)을 내보이며 감회에 젖었다.

그는 "의병장으로 활동하신 종증조부님의 나라사랑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격문을 뒤늦게나마 소장하게 돼 가슴이 뿌듯하다"고 털어놨다.

가로 35.4㎝, 세로 20.2㎝의 한지에 한문으로 꼼꼼하게 쓰여진 격문에는 명성왕후 시해, 단발령 등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의 상황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을 백성들에게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격문은 최근 영천 신령의 한 서당에서 발견돼 김 의병장의 후손인 김씨에게 전달됐다.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의병들이 12번 접어 옷깃에 숨겨 전달한 이 격문은 각지에서 의병을 모으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1848년 태어난 김 의병장은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다음 해인 1896년 의성지역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첫 전투에서 일본군 수십명을 죽이는 전과(봉산역.鳳山役)를 거둔 것을 비롯해 산운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중 다리에 총상을 입어 1907년 고향 사촌으로 돌아왔다가 1909년 별세했다.

항일운동에 공헌한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44년동안 교직생활을 한 김씨는 "집안 어른 세분이 의병에 참여하자 일본군이 집을 불태우는 등 일가가 수많은 고초를 겪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해방이 된 후에도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의 공적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라며 "친일파 후손들이 재산을 다시 찾겠다고 나서는 반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의 후손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어 마음이 착잡하다"고 말을 맺었다.

이대현기자 sky@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