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 대가야-(35)남해까지 뻗치고

대가야의 힘과 칼, 토기는 황강과 남강, 섬진강을 휘감아 피를 적셨고, 적신 피는 다시 대가야의 땅이 돼 되돌아왔다.

그 힘은 또 백두대간을 넘어 멀리 금강과 영산강 언저리까지 미쳤다.

그리고, 400년대 후반 마침내 섬진강을 헤치고 바닷길을 뚫었다.

그 바닷길에서 처음으로 맞닿은 곳은 남해 섬과 마주한 전남 여수지역이었다.

가야산을 모태로, 경북 고령을 근거로 한 대가야는 400년대 가야제국의 맹주로 두각을 드러냈다.

힘의 원천은 '씨 1말을 뿌려 최소 120~130말을 뽑아내는' 풍부한 농업생산력이었다.

가야산 계곡을 타고 흘러내린 가천과 야천, 그리고 그 두 하천을 보듬은 회천이 대가야인의 젖줄이었던 것. 경남 합천군 야로의 철 생산지 확보는 농기구와 무기, 금속 장신구의 제작과 교역으로 이어져 강력한 힘을 보탰다.

게다가 고령읍 내곡리에서 생산된 토기는 경남 서남부와 호남 동부 곳곳에 뿌려져 대가야의 세력권과 영향력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됐다.

야로 철산지를 확보한 대가야는 합천을 지나 거창 함양을 통과한 뒤 백두대간을 넘어 남원 장수 진안으로, 다시 섬진강을 따라 임실 순창 곡성 구례 하동으로 남하해 여수에 도달했다.

또 비슷한 시기 백두대간을 거치지 않고 함양 산청 진주 등 남강 줄기를 타고 내려가 하동을 거쳐 여수에 닿는 루트도 뚫었다.

여수시 문수동 미평동 둔덕동 일대에 걸쳐 있는 '고락산성(200m)'. 산성 정상에서 보면 북쪽으로 호랑산성(虎狼山城)이, 북서쪽으로 순천 검단산성(劍丹山城)과 왜성(倭城), 서쪽으로 순천만이 있다.

남동쪽으로는 오동도와 돌산대교를 끌어안은 남해가 펼쳐져 있다.

바다에서 뭍으로 이어지는 길을 조망할 수 있는 요새다.

500년대 전반, 백제가 쌓은 고락산성은 정상 봉우리의 돌로 쌓은 보루(堡壘), 우물 역할을 한 집수정(集水井) 3곳, 저장공, 건물터와 외 구들, 무기가 떨어졌을 때 사용한 둥근 돌(石環) 등이 탄탄한 방어망을 갖추고 있었다.

고령의 주산성(主山城), 운라산성(云羅山城), 봉산산성(蓬山山城) 등과 비슷한 구조였다.

백제 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이 곳에서 대가야 목긴 항아리(長頸壺)를 비롯해 가야 토기가 상당량 함께 출토됐다.

토착계와 소가야(경남 고성) 토기 조각도 일부 나왔다.

이동희 순천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와 관련, "백제가 가야지역에 진출하기 위해 애쓰고, 대가야가 신라의 진출을 막기 위해 백제의 도움이 필요하던 시기의 정황을 말해주는 유물로 보인다"고 말했다.

고락산성 아래 평지를 이루고 있는 여수시 미평동 분지. 여수시 최북단에 위치한 이 주변에는 고인돌(支石墓) 5, 6기와 채소밭이 벽돌공장 옆에 동그라니 자리하고 있었다.

공장과 밭, 주택이 들어서면서 일대 유적지는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다.

여기서 가야계 토기 6점이 채집됐다.

목긴 항아리와 짧은 항아리 등 4점, 목짧은 굽다리 항아리 1점, 손잡이 달린 굽다리 항아리 1점 등이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김병호(여수여자고 교사) 이사는 "동네 주민이 이 곳에서 라면박스 1개 분량의 토기를 찾아내 집 화장실에 보관하다 자녀가 부수는 바람에 원형이 남은 것은 대 여섯 점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 유물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중 목긴 항아리 2점과 손잡이 달린 굽다리 항아리 1점 등은 전형적인 대가야 양식으로, 현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다로 나온 대가야는 여수와 내륙으로 접한 순천에도 진출했다.

순천에서 최근 개통한 남해고속도로 연결도로인 '삼산로'와 인접한 곳의 망북마을에 위치한 용당동 '망북유적지'. 동남쪽으로 봉화산(烽火山;355m), 서북쪽으로 삼산(三山;191m)이 바라다 보이는 곳으로, 남해고속도로 인터체인지에서 차량으로 2분 거리다.

주민들이 과수원을 만드는 과정에서 돌널 및 돌방무덤(石槨墓) 4기가 확인됐다.

망북유적지 1호 무덤의 매장 주인공은 가야문화권에 있던 토착인으로, 향후 새롭게 백제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현지 지배층으로 추정된다.

유적지에서는 백제 유물, 토착계 유물과 함께 대가야 양식을 모방해 현지에서 만든 토기가 상당수 쏟아졌다.

이중 대가야 양식 토기(주로 뚜껑) 5점은 국립 광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유적지는 가야문화권과 영산강 백제문화권 사이의 점이지대(漸移地帶)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지역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특히 500년대 초반 전남 동부지역으로 진출한 백제의 역사적 정황을 살펴볼 수 있다.

용당동 인근에서는 이외에도 대가야 토기조각 일부가 채집됐다.

이동희 학예연구사는 "400년대 가야문화권에 속한 전남 동부지역은 400년대 후반부터 500년대 중반까지 대가야 양식 토기가 확인되고, 500년대 전반 이후에는 백제계 토기가 가야 토기와 함께 본격 등장한다"고 말했다.

백제와 가야계 복합 무덤의 전형적인 사례는 대가야 토기 뚜껑(蓋)이 확인된 순천 '죽내리 고분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바닷길로 나선 대가야는 이처럼 남해를 거쳐 동해로, 또 남원 장수나 순창을 기점으로 호남 내륙을 뚫고 동해로 나가 이젠 드넓은 대륙, 중국으로 향했다.

479년 대가야 하지왕의 명을 받은 사신 일행이 섬진강 하구 또는 동해를 통해 중국 남제에 들어가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를 받았다.

가야제국을 대표하는 왕국으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셈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 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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