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아!대가야-(40)1500년전 얽힌 국제관계

*광주에 왜계 무덤?

광주시 광산구의 서남쪽, 평동저수지 상류에 있는 명화동 '화동마을' 뒷산 구릉. 마을을 에워싸고 저수지 남쪽 황룡강 주변 들판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지난 92년 겨울, 향토사학가 김희규씨의 신고로 이 구릉에서 약 30m 길이의 고대 무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립 광주박물관이 이듬해부터 두 차례 조사를 벌이면서 왜(倭)계 무덤의 실체가 하나둘 벗겨졌다.

이른바 광주 '명화동 고분'.

무덤 형태는 앞쪽이 모나고 뒤쪽이 둥근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일명 장고형 무덤)이다.

둥근 봉토(峯土) 둘레에는 U자 모양의 도랑(周溝)이 돌려져 있었다.

영산강 유역의 고대 무덤과 왜 전방후원분에서 주로 나타나는 형태다.

당시 발굴조사에 참여한 광주박물관 은화수 학예연구사는 "도랑은 무덤의 경계를 나타내는 외부시설로, 무덤 자체의 신성화와 물빠짐 기능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또 무덤 앞뒤를 연결하는 부분에는 원통 모양 토기가 50cm 간격으로 나타났고, 도랑 안에서도 같은 모양의 토기 조각이 상당수 출토됐다.

둥근 봉토 안에서 확인된 돌방(石室) 1개는 바닥에 진흙을 깔아 다진 뒤 가로로 구멍을 내 만든 지상식(地上式) 횡혈(橫穴) 구조였다.

지하 또는 반지하식이 대다수인 백제의 돌방무덤과 구별되는 양식이다.

이 돌방 안에서는 금동 귀고리, 철제 장식(金交具), 화살통 장식(葫·), 화살촉, 쇠도끼, 뚜껑접시(蓋杯)와 뚜껑 등이 나왔다.

이 중 가운데가 볼록한 젖꼭지(乳頭;또는 단추) 모양 뚜껑 1점은 전형적인 대가야 양식이다.

화살촉과 화살통 장식 등 유물은 무장(武裝)적 성격이 짙은 사람이 돌방에 묻혔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처럼 △무덤에 돌려진 U자 모양 도랑 △도랑 안에 연속적으로 배치된 원통모양 토기 △지상의 횡혈식 돌방 △묻힌 이(彼葬者)의 무장적 성격 등은 '명화동 고분'의 특징으로 꼽힌다.

유물 등을 종합해 볼 때 무덤은 500년대 전반에 쌓은 것으로 추정됐다.

이 무덤은 왜계 양식에다 묻힌 이도 왜인일 가능성이 엿보인다.

무덤 형태가 전방후원분인 것을 비롯해 주변에 도랑이 있고, 두드려 찍은(打捺) 기법으로 문양을 낸 원통모양 토기를 줄지어 배치한 점 등 출토 유물과 전반적 구조가 왜계 무덤과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전방후원분은 200년대 말부터 500년대 말까지 축조된 전형적인 왜 지배층 무덤이다.

또 지상식 구조를 갖춘 횡혈식 돌방과 원통모양 토기는 영산강 유역에 분포하는 독널무덤(甕棺墓)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광주 명화동 고분과 영산강 세력, 대가야, 왜는 당시 어떤 관계를 가졌던 것일까.

삼한시대, 영산강 유역에는 백제의 전신인 마한 소국들이 있었다.

이 유역에는 뚜껑접시, 아가리 넓은 구멍 있는 작은 항아리(有孔廣口小壺) 등에서 독특한 토기양식을 갖추고, 독널무덤을 구축한 독자세력이 일정기간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같은 수계에 속하는 명화동 고분은 이 유역의 대표적 양식인 독널무덤이 집중돼 있는 나주 '반남 고분군'과 약 30km 떨어져 있다.

명화동 고분은 영산강 세력의 특징을 가지면서도 백제에 편입된 이후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

단, 이 세력이 백제에 편입된 시기는 300년대 말(문헌 사학), 400년대 말 또는 500년대 초(고고학) 등으로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그렇다면 왜계 무덤구조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방후원분은 명화동뿐 아니라 광주 월계동 '장구촌 고분', 요기동 '조산마을 고분', 장성 '영천리 고분', 해남 방산리 '장고봉 고분', '용두리 말무덤', 함평 죽암리 '장고산 고분', 예덕리 '신덕고분', 영암 태간리 '자라봉 고분' 등 10여기에 달한다.

영산강 수계인 광주를 비롯해 전남 나주, 담양, 장성 등을 중심으로 주로 광주전남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셈이다.

광주전남지역의 전방후원분에 묻힌 이가 왜인이라면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경북대 박천수 교수는 "500년대 초반 백제-대가야-신라-왜 등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백제에 고용된 '용병(傭兵)'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또 명화동 고분에서 나온 대가야 토기뚜껑과 관련, 박 교수는 "백제-왜 연합군이 전쟁 과정에서 대가야로부터 획득했거나, 단순한 문화교류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그러나 광주박물관 송의정 학예연구실장은 "명화동 고분 등 전방후원분에 묻힌 이들은 왜인이라기보다 왜에 장기 체류하고 돌아온 백제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또 "유물 1,2점으로 양국간 정치적 관계를 나타낼 수는 없고, 백제-대가야-소가야-왜 등 광범위한 문화교류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500년대 초반 백제와 대가야는 왜의 일부 세력들과 공조하면서 서로 치열한 영역다툼을 벌였다.

512년 섬진강 하구인 여수 순천 광양 일대를 둘러싼 격전, 513년 기문(己汶;남원)지역 확보를 위한 싸움, 514년 대가야의 대사(帶沙;하동) 일대 성(城) 축조 등 '일본서기'에 나타난 기록들이 이의 방증이다.

당시 백제는 왜에 사신을 보내 군사적 지원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왜인을 백제 관료로 발탁하기도 했다.

왜는 그 반대급부로 백제로부터 불교 등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서 자국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정치, 군사, 문화 교류를 벌인 것이다.

아무튼 대가야 영향권에 속한 경남 의령의 '경산리 무덤'과 광주전남지역에 분포하는 '전방후원분' 등 왜계 무덤의 실체를 파헤치는 작업은 1천500년 전 복잡하게 얽힌 국제관계를 풀 수 있는 주요 고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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