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이념 논쟁'을 즐겨라

그야말로 '이념의 홍수' 시대다.

자고 나면 하나씩 불어나는 이데올로기 논쟁에 국민은 지쳐있다.

그것도 산사에서나 있을 법한 선(禪)문답식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당장 가치판단을 통해 결말을 내야하는 실천적 이데올로기들이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어려운 서민들 머리는 더욱 복잡해진다.

도대체 뭐가 뭔지 편안한 날이 없다는 것이다.

햇볕정책이 퍼주기냐 아니냐, 경제성장이냐 분배냐, 보수냐 진보냐 라는 고전적인 이념 논쟁에서부터 탄핵은 정당한가, 미군 철수는 옳으냐 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신행정수도는 올바른 정책인가, 아파트 원가공개는 시장원리에 맞는가 라는 구체적인 문제로까지 번져 바람 잘 날이 없다.

이제 김선일씨가 이라크에서 끝내 피살됨으로 인해 파병논쟁은 또 한차례 한국사회를 뒤덮을 것으로 보인다.

◇ 논쟁이 위기로 발전해서야

이념 논쟁에는 딱 부러진 정답이 없다.

그러나 논쟁은 사회를 성숙하게 만든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당파싸움에서 보듯 유교적 이념논쟁에는 이골이 나있다.

그러나 근대적인 사회적.경제적.철학적 이념논쟁은 이제야 봇물을 이루고 있으니 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현상인가. 배불리는 정책에만 치중하다보니 이데올로기 싸움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인가.

문제는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인해 사회가 퇴화(退化)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계층간 분열과 대립으로 치달으면 생산적 담론이 돼야할 논쟁이 '이데올로기의 위기'로 추락한다.

가치의 본질은 온데 간데 없고 목소리 높이기와 패거리 문화가 창궐한다.

사람들은 오직 개인의 이득에만 눈이 어두워진다.

17세기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제 얘기 하나. 벌의 왕국이 있었다.

왕과 귀족 벌은 막대한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호화 생활을 누렸다.

강력한 군대로 남의 나라를 침략했다.

숱한 병사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개선할 때는 귀족들이 선두에 섰고 훈장은 언제나 그들 몫이었다.

재판은 판사와 변호사에 갖다바친 뇌물의 크기에 따라 시시비비가 가려졌다.

어느 날 이 악의 왕국에 한 성인이 나타났다.

벌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깨끗하고 바르게 살기로 맹세했다.

왕과 귀족은 궁전과 사치품을 팔아 빚을 갚았고 군대는 해산됐다.

극장도 폐쇄됐으며 벌들은 건물에 사는 것도 사치라 생각하고 나무 구멍으로 이사를 갔다.

모두가 정직한 생활을 하다보니 재판할 일도 없어졌다.

재봉사.목수.군인.배우.요리사 등은 모두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때 자신의 식민지였던 곳의 벌들이 대거 공격을 해와 착한 벌들을 모조리 잡아 노예로 부렸다.

벌들은 두려움에 떨며 매일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맨더빌의 시 '꿀벌의 우화'다.

이 시는 부제가 고약하다.

'개인의 악덕이 공공의 이익'(private vices, public benefits)이다.

그렇다면 악의 왕국은 계속돼야 하는가, 당장 이념논쟁에 빠진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해 우리나라의 카드정책을 떠올린다.

가진 돈이 없는데도 마구 긁어댄 결과, 우리는 외적 성장을 유지했다.

"덕을 갖춘 훌륭한 성품만으로는 국민의 생활이 윤택해 질 수 없다"는 맨더빌의 주장과 거의 맞아떨어진 정책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결과는 어떻게 됐는가. 빚더미에 눌러앉은 '거대한 불량사회'가 되지 않았는가.

약 100년후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가 이 문제를 해결했다.

"부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무리 높은 이윤도 가치가 없으면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시장시스템을 악용할 수 있다.

도덕성이 없으면 경제적 자유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다.

특히 지배계급의 도덕성이 중요하다"고 일갈했다.

이것이 바로 서양 자본주의의 밑바닥을 흐르는 가치관이다.

◇ 韓國은 지금 '방황의 시대'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열매만 따먹었지 그 이념에 대해서는 별로 논쟁하지 않았다.

성장만 좇다보니 가치(價値) 논쟁은 등한시했다.

따라서 가치 문제가 제기되면 자연히 방황하게된다.

교육정책이며 경제정책, 심지어 국방정책까지 남의 나라 것을 그대로 옮겨다 쓰거나 베끼기 바빴지 진정 내면에서 우러난 처절한 가치 논쟁을 거쳐 완성된 것이 얼마나 있는가. 지금 한국은 방황의 시대를 살고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쟁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당장 정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논쟁이 생겼을때 행동의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도덕적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아담 스미스는 이를 동감 혹은 공감(sympathy)이라고 했다.

그렇다.

논쟁에 휘말려 방황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논쟁 자체를 즐겨라. 그리고 이념논쟁에 목숨걸지 말고 마음을 열고 남의 얘기에 귀기울여라. 그리고 공감대를 형성하라. 한국의 딱한 현실을 보다못한 아담 스미스가 250년 된 낡은 책장을 지금 우리에게 펼쳐보여준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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