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와 사람-모필장 기능보유자 이인훈씨

세 평 남짓한 방은 칼과 털로 가득했다.

족제비 노루 양 청설모 쥐 등 온갖 동물의 털이었다.

치죽칼 호부칼 도모칼 쌍사칼 텅칼 대칼 등 털과 대를 다듬는 칼도 즐비했다.

한켠에는 먹과 벼루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붓 향이 물씬 풍기는 방이었다.

이인훈(56.대구시 달서구 본동)씨는 이 방에서만 10년 이상 붓과 씨름하고 있다.

붓과의 싸움은 벌써 40년 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털이 갈라지지 않고 빠지지 않아야 좋은 붓"이라고 했다.

"좋은 붓은 가는 털을 다루는 손 기술에 달려있다"며 "무엇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최근 대구시로부터 '모필장(毛筆匠)'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고, 전통 붓 제작기술은 대구시 무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됐다.

할아버지로부터 3대째 가업을 이어온 내력과 전통 붓 만들기에 전념해온 장인정신이 평가를 받은 셈이다.

지역에서 가늘고 짧은 전통 붓을 만들 수 있는 장인은 이씨가 유일하다.

그는 "전국적으로 흰 붓의 제작자는 더러 있지만, 족제비나 노루 털로 붓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했다.

길고 굵은 양털로 된 흰 붓은 만들기가 쉽지만,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이나 암노루 겨드랑이 털로 만든 장액필(獐腋筆)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양질의 재료를 구하는 것도 중요한 일거리다.

충북 제천의 시장에 나온 강원도 털, 포항의 대, 광주의 왕대를 구하느라 전국을 쫓아다닌다.

제대로 된 붓의 평가는 서예를 하는 아내 윤경숙(56)씨의 몫이다.

아내는 획을 그으며 꼼꼼한 검수를 맡는다.

글씨가 고르게 써지지 않는 붓은 여지없이 털이 잘려나간다.

이씨는 최근 전통 붓이 크게 위협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90년대 말부터 전통 붓은 점점 사라지고, 중국산 수입 붓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10년 전만 해도 이 지역에 13개이던 필방이 절반으로 줄었고, 털이 잘 갈라지고 뽑히는 중국산이 국내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붓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붓을 만드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털을 재단하고 배합하고 뽑아내고 밀가루를 묻히고 지지는 등의 일이 힘들다는 것이지요".

붓 만들기는 과정 하나 하나에 신경을 놓으면 헛일이 되고 만다.

족제비 꼬리털의 경우 재단한 털을 잘 섞어 배합한 뒤 종이에 아기 주먹 크기로 둥글게 말아 보관한다.

일정 기간 후 물에 적신 뒤 거꾸로 된 털을 모두 뽑아내고 털 끝부분인 생명선에 밀가루를 묻힌다.

털이 갈라지지 않도록 그늘에 3, 4일 말린 뒤 뿌리 부분을 밀로 잘 지져내야 한다.

이렇게 만든 털은 속 중간 겉 부분을 차례로 준비한 뒤 둥근 대나무에 입혀 붓촉을 만들고 다시 물에 적셔 불필요한 털을 뽑아낸 뒤 그늘에 말려 대에 꽂으면 하나의 붓이 완성된다.

여기서 가는 털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관건이다.

엔간한 붓 제작자는 가는 털은 제대로 만질 수도 없다는 게 필방 관계자들의 얘기다.

이씨는 고유의 붓 전통을 잇기 위해 현재 셋째 아들과 전수자 3명에게 붓 기술을 전하고 있다.

그는 "장인이 되려면 평생 배워도 끝이 없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후진들에게 충고했다.

이씨는 요즘 전통 붓 기술을 이어가면서도 색다른 붓을 연구하고 있다.

"호랑이 등 동물 그림을 그릴 때 붓 한 획으로 한 가닥의 털이 아니라 몸체의 상당부분을 한꺼번에 그릴 수 있는 붓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을 굳게 이으면서도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장인정신이 엿보인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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