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보고

박정희도, 노무현도 마음대로 욕하자

10.26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요즘 논란이 분분한 영화다. 마침 지난 1일 저녁 이 영화 시사회가 열렸다. 영화의 앞 뒤 다큐멘터리 부분이 삭제된 영화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가 제기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진 때문이다. 상영관 앞에선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이 '희망 21'이란 단체 명의로 영화 상영을 반대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영화는 사회적 관심만큼 뛰어난 수작(秀作)이 아니었다. 오히려 타작(墮作)에 가까웠다. 감독은 '블랙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기 전엔 박 전대통령을 일방적으로 '씹고 비트는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영화는 10.26 당시 이른바 우리 국가 지도층의 타락과 무능, 그리고 부도덕한 권력을 비판했다. 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한 10.26 가담자들의 무모함에도 조소를 보냈다.

그러나 감독의 의도는 블랙코미디였는지 모르나 관객의 입장에선 코미디도 정통 드라마도 아니었다. 풍자와 패러디는 약했고 비판의식도 무뎠다. 스토리 역시 너무 평면적이었다. 조금 혹평을 하면 사건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했다. 박지만씨도 예견했듯이 가처분 신청을 하는 바람에 오히려 흥행을 도와준 셈이 됐다. 함께 영화를 본 이들은 "감독과 지만씨가 흥행을 위해 짜고 친 고스톱 아니냐"는 농담까지 건넬 정도였다. 영화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자. 이 글이 영화평론도 아니고 보리수염은 영화평론을 쓸 만한 재주도 없다.

이 영화가 구설에 오른 것은 '우리의 영웅' 박정희를 '모욕'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추종자들에겐 견딜 수 없는 치욕임이 분명하다. '박근혜 죽이기'라는 음모설도 나왔다. 그렇다고 가처분 신청까지 하면서 상영도 안한 영화를 법원이 '사전 검열'하도록 한 조치는 지나쳤다. 일부 다큐멘터리 부분이 삭제되긴 했으나 영화는 상영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문화예술계로부터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법원이 비난받도록 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결국 얻은 건 없고 논란만 증폭시켜 영화 흥행만 도운 꼴이 됐다.

여기서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문제를 잠깐 살펴보자. 우리 헌법 21조는 미국 수정헌법 1조와 달리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항이 있다. 우리 헌법 제21조 ④항은 언론·출판은 타인의 명예나 권리 또는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언론·출판이 타인의 명예나 권리를 침해한 때에는 피해자는 이에 대한 피해의 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규제 조항을 두고 있다. 반면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종교, 언론 및 출판의 자유와 집회 및 청원의 권리)는 공산주의나 나치찬양, 사이비 종교까지 어떤 내용을 표현하든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물론 사생활 침해 등에 따른 당사자의 고소가 있으면 손해배상문제는 책임져야 한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놓고 벌어진 가처분 신청은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인격권이 상충할 때, 어느 쪽을 어디까지 보호할 것인가가 논란의 핵심이다. 법원은 영화의 픽션 장면이 고인과 유족의 인격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지만 표현 자유의 한계를 넘지 않았다며 상영금지 신청을 배척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장면은 허구와 사실을 헷갈리게 해 인격권 침해소지가 있다고 보고 삭제토록 했다. 헌법21조 ④항을 의식해 절충안을 내놓은 셈이다. 법원의 이번 결정에 대한 법리적 다툼은 상급법원에 맡기고 다시 현실 문제로 돌아서자.

한 때 '국가원수 모독죄'라는 게 있었다. 고 장준하 선생은 지난 1966년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다 이 죄목으로 구속된 적이 있다. 정말 이런 죄가 있었는지 변호사에게 물었다. '국가원수 모독죄'는 없고 '국가모독죄'가 형법에 있었다고 했다. 1988년 12월 삭제된 '국가모독죄'는 헌법으로 정한 국가기관을 모독할 때 적용한다는 조항이 있어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비난했을 경우 적용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법이 삭제됐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죄목으로 붙잡혀 갈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제일 먼저 '국가모독죄'로 줄줄이 구속되지 않았을까. 한나라당 의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모독한' 사례만 해도 '조폭 두목' '개구리' '복날 개장수' '미숙아' '깍두기머리 임금님' 등 수두룩하다.

예전과 비교하면 세상 참 좋아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욕했다고 붙잡혀 간 사람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과거 군사정권 시절, 술 마시면서 대통령을 욕하다 파출소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래서 누가 시국과 관련된 얘기라도 꺼내면 주변부터 먼저 살펴야 했다.

이것은 약과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불×값을 해야지. 육시×놈, 죽일 놈 같으니라고." "그 놈은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이야." 지난해 한나라당 의원들이 공연한 '환생경제'라는 정치풍자 연극에 나오는 대사다. 조롱의 대상자는 바로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물의를 빚자, 한나라당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연극은 연극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 논리를 연장하면 '그때 그 사람들'도 영화일 뿐이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보면서 '살아있는 권력'은 욕해도 괜찮고 '죽은 권력'은 욕할 수 없다는 현실이 오히려 코미디로 느껴진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은 문제되고 현직 대통령에 대한 막말은 괜찮은가. (임상수 감독! 차라리 이걸 코미디 영화로 만드시오.) 헌법과 법률이 국민의 기본권인 입을 열 권리를 막는다면 개정해야 한다. 다만 그 입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이가 소송을 제기하면 그 때 법원이 판결하면 된다.

박정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이 있듯이 노무현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박정희라면 이가 갈리는 사람도 적잖고 노무현을 보기만 해도 알레르기가 생기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면 노무현을 욕할 자유가 있듯이 박정희도 욕할 자유도 있어야 한다. 현직 대통령이든, 전직 대통령이든, 누구든 욕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 배상은 자부담(自負擔)이다.

조영창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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