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고향을 위해 사는 것 같아요. 아내나 가족보다도…."
공기 좋고 물 맑은 고장 김천시 농소면. 대구에서 차로 1시간 가까이 달려가 만난 차부순(60)씨는 이렇게 첫마디를 열며 빙긋이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생활에 익숙한 서울사람이 남편 때문에(?) 낯설기만 한 농촌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를 보고 10명 중 2, 3명은 부러워하지만 7, 8명은 참 힘들겠구나 그럽니다. 하지만 힘들겠다 생각하는 분도 여기서 2, 3년만 지나면 정이 들어 떠나기 힘들어질 걸요." 듣고 보니 전혀 남편을 탓하는 말투가 아니다.
"집사람이 제 덕을 좀 봤죠. 예민해서 잠자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데 이곳에 온 후로는 코를 드르렁 골며 잠을 잘 자니까요." 남편 김환옥(59)씨. 이곳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40여 년간 서울에서 생활한 그도 서울사람이나 진배없다. 모 일간지 광고국장, 광고회사 사장. 소형차 티코 모델을 1년간 서기도 한, 잘 나가는 광고인이었던 그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꿈과 희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시골집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생활을 하면서 20년간 조금씩 주변 땅을 사며 예쁜 농장을 만들 꿈을 키웠습니다. 퇴직할 때까지 5년만 농장을 지키라고 아들 부부 내외에게 부탁하기도 했죠."
연봉 3억 원의 직장도 뿌리치고 고향으로 내려온 지 3년. 그는 스물 세 살에 홀로 되신 어머니가 보리 갈고 콩을 심어 오누이를 먹이고 가르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게 해 준 고향 땅에 정월농장을 일구었다. 햇볕 잘 드는 양지에 1천 개의 장독을 놓고 우리 콩으로 잘 띄운 메주로 장을 담가 '김천정월된장(www.jungwol.co.kr)'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나가고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는 농소면 일대는 원래 메주 고을이었습니다. 이모작으로 수확한 콩으로 농한기 때 메주로 띄워 내다 팔았지요. 30년 전까지만 해도 장을 담그는 시기에는 김천시장에 큰 메주장이 섰습니다."
하지만 보리'콩을 심던 논밭은 자두'포도나무 등 소득이 높은 작물로 교체돼 콩 생산이 줄어들자 정부에서 미국산 콩을 무관세로 공급하고 메주를 만들어 판매하도록 해 농소면 메주가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TV 화면을 통해 소개되고 있단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국산 콩을 고집하고 있다. 우리 콩은 무관세로 들어오는 수입산 콩보다 6배 이상 비싸지만 질 좋은 전남 고흥의 콩을 1년에 750가마 정도 수매해 유전자 변형 콩인지 품질 조사까지 거쳐 장을 담근다. 또 농장의 땅을 늘려 직접 우리 콩 재배도 하고 있다.
간편하게 수시로 담글 수 있는 제조 된장, 고추장 등이 범람하고 있지만 그는 재래방식으로 1년에 한 번씩밖에 못 담그는 전통 된장을 고집하고 있다. 커다란 가마솥 8개에 장작불로 하루 세 번씩 콩을 삶아 잘 띄운 메주를 100m 지하에서 끌어올린 천연 암반수를 이용해 장을 담근다. 그렇다고 바로 만든 된장을 팔지도 않는다. '장은 묵어야 제 맛'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2년 넘게 발효된 짙은 갈색의 된장을 내놓는다.
"햇된장이 색은 곱지만 메주 냄새가 남아있고 맛도 설익은 듯합니다. 하지만 2년 이상 발효된 된장은 색은 진하지만 깊게 곰삭아 시골 된장의 구수한 향미가 잘 살아나지요." 그는 오래 발효된 된장이 항암 효과가 좋다는 한 학자의 발표로 찾는 이들이 몰려 홍역을 치른 적도 있다고 했다.
고추장, 청국장 등도 만드는 이 집 간장은 겹장인 점도 특이하다. 메주를 소금물에 담가 숙성, 발효시키는 막간장이 아니라 1년 된 간장에 다시 메주를 넣어 우려내 진하면서도 뒷맛이 군더더기가 없다고 한다.
이들 부부의 정성과 애정이 담겨 있는 농장은 예쁘게 잘 가꾸어져 있다. 봄이 되면 야생화 등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작은 연못, 원두막, 흙집이 시골정취에 흠뻑 빠지게 만든다.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십니까'라는 푯말 아래 등잔, 절구, 탈곡기, 지게, 멍석 등 옛날 농기구'생활용품들도 전시해 놓았다.
초등학교때는 시골에서 지내는 게 아이의 정서에 좋겠다는 생각에 손녀 정현(8)이를 거두어 함께 사는 것도 이들 부부의 큰 즐거움이다. 된장을 사러 오는 외지인에게 아무 부담 없이 흙집에 머물도록 하고 시골 밥상을 차려내는 이들 부부가 다정하게 들려주는 '부부'라는 노래는 이곳을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게 한다.
"여보, 당신에게 하고픈 말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사진: 음력 정월에 갓 담근 장독 뚜껑을 열어보고 있는 김환옥씨 부부. 2년 이상 발효된 된장은 색은 진하지만 깊게 곰삭아 구수한 향미가 잘 살아난다. 박노익기자 noi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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