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대학로의 마로니에 공원 부근에서 만난 김복희(57·金福喜)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겸 한양대 무용학과 교수는 이웃집 큰누나처럼 편안했다.
기다란 생머리에 화장기 적은 얼굴로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액세서리라고는 인사동 공방에서 산 귀고리가 전부. 파마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미장원에 갈 필요없이 그냥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는 그는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멋스럽다.
말투는 경상도 아줌마. 대구에서 중앙초등, 제일여중, 대구여고를 졸업했다지만 이화여대에 진학한 후 40여 년간 대구를 떠나 있었는데도 사투리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의 삶은 무용 그 자체다.
도일(渡日)한 무용가 조용자씨가 이종사촌 언니라 6세 때부터 자연스레 무용을 접했으며 환갑을 앞둔 지금까지 외길이다.
처음 무대에 선 것은 지난 71년 26세 때. 그렇게 어린 나이에 큰 무대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했다는 것은 파격이었다.
무대를 얻기 위한 '빽'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종사촌 오빠의 친구인 신도환 당시 국회의원이 도와줬다고 고백(?)했다.
50년간 춤을 춘 그에게 붙는 형용어는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 또는 '대가' 등으로 현란하다.
30년간 한양대 교수로 숱한 후진을 길러낸 데 대한 의례적 예우는 아닌 듯하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란 믿음으로 한국인의 색깔과 냄새, 정서, 풍속, 사상, 삶 등을 무용에 담으려 노력해온 데 대한 찬사일지 모른다
정작 그는 자신의 무용에 대해 "몰라예. 저는 특별히 보람있다거나 내가 뭐 대단하고 그런 것도 별로 없고, 그냥 작품하고 끝나면 다음 작품 구상하고 그렇게 살아갈 뿐이라예."라고 한다.
그의 꿈은 한민족의 색채가 물씬한 한국적 현대무용을 세계가 인정하는 새로운 장르로 만드는 것. "일본 부토(舞蹈)에 유럽인이 열광하는 것은 일본의 정신이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그는 "어렵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 세대에 못하면 다음 세대에 하면 되죠."라고 했다.
대구·경북에서 공연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역 내 무용가들이 더 활발하고 두드러져야 하는데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자주 공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 대신 그의 무용이 '한국적'이다 보니 외국 공연이 훨씬 잦았다.
"움직이지 않으면 무용가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언제라도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열심히 연습한다는 그이지만 "나이가 너무 들어 혹시 넘어질까 관객들이 불안할 정도면 무대에 설 수 없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최재왕기자 jwchoi@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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