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경옥입니다-장하(長夏)

우리에게 사계절이 있음은 축복이다. 이래저래 생활비가 더 들긴 하나 계절의 변화가 주는 묘미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큰 즐거움이다. 만약 늘 찌는 듯 덥고 공기마저 찍찍한 습기로 가득 차있다면, 혹은 일 년 내내 음산하니 춥고 뼛골까지 냉기가 스며든다면…? 그러기에 한반도가 점차 아열대화 돼가고 있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아찔한 기분이 든다.

여하튼 아직까진 사계절이 뚜렷하고 보니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사계의 순환을 보면 어쩌면 저리도 우리 인생과 닮았나 싶다. 야린 연둣빛에서 힘이 넘치는 싱그러운 녹빛,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 빛깔, 마침내 마른 들풀의 빛깔까지.

계절마다의 특징적인 성격도 우리 인생을 꼭 빼닮았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생(生)의 계절'이요, 여름은 성장을 재촉하는 '성(成)의 계절'이며, 가을은 거두어들이는 '수(收)의 계절', 겨울은 저장하는 '장(藏)의 계절'이다."(이재철 저서 '내게 있는 것' 중)라는 글귀처럼.

한여름, 잎들이 눈부실 만큼 청청하다. 달력상의 여름은 채 한 달도 안 남았다. 흥미롭게도 한의학(韓醫學)에서는 일년을 사계절이 아닌 오계절로 나눈다고 한다. 똑떨어지게 금을 그을 수는 없지만 여름과 가을 사이에 또 하나의 계절, '장하(長夏)'를 둔다는 것이다. 봄에 생명이 맺힌 열매가 여름 뙤약볕 아래 포동포동 살을 찌워오다 이맘때부터는 속으로 익어가면서 가을을 준비한다는 거다. 시금털털한 풋열매가 향기로운 열매로 변화되니 '장하'는 곧 '화(化)의 계절'이라는 것이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화(化)의 과정'을 둔다는 것, 참으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쌀을 끓여 익히기만 해서는 제대로 된 밥이 될 수 없고 충분히 뜸을 들여야만 맛있는 밥이 되듯 '장하'는 열매를 달콤하게 익히기 위해 꼭 필요한 계절, 뜸 들이는 계절인 것이다.

속도가 미덕인 이 시대, 빠를수록 강자가 되는 이 사회에서 어쩌면 우린 너무 '성(成)'에만 집착해온 것은 아닐까. 겉모습은 그럴싸하나 속은 날 것 그대로인 사람들이 우글대는 이 세태가 그런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한다. 향기롭게 익어가기 위해 우리에겐 또 하나의 계절이 필요하지 않을는지'''.

전경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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