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부잣집 이웃에 살기

분배, 평등, 평준화 등이 개혁적 가치의 중심으로 떠올라와 있다. 열심히 일하기보다 큰 소리로 요구하기가 득세의 비결이 되었다. 얼마나 노력했느냐보다 얼마나 핍박받았느냐가 자랑거리가 되었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평등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들은 경험한다. 누구나 내가 독차지해야 되지만 할 수 없이 공평한 것에 그치기로 타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자의 몫(Lion's Share), 20%의 부자가 80%의 재화를 소유한다. 80%로 만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상 가지려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전체의 틀을 깨뜨리게 되기 때문에 80%에 그치기로 타협한다. 그가 부를 가진 것이 나에게 득이 되고 기쁨을 줄 때 나는 그를 '괜찮은 부자'라고 여긴다. 그가 가진 부가 나에게 고통을 줄 때 나는 그를 '졸렬한 부자'라고 여긴다. 졸부는 주위 사람들에게 부자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일으키므로 다른 부자들의 안전에도 위협이 된다.

부잣집 이웃에 살기는 고통이 많다. 마음 상하기 쉽고 자존심 상하기 쉽고,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잃기 쉬운 자리다. 파산한 사업가가 식당 설거지 일로 지쳐 돌아온 아내와 아르바이트 나가는 아들, 딸에게 그래도 "눈 들어 이것을 보라" 할 별빛은 어디 있는가? 부자가 되는 것은 쉽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도 쉽지 않다. "저것은 신포도"라고 자신을 속이는 것도 마땅치 않고, 부자들의 욕심 탓으로 책임을 돌려 봐도 시원치 않다. 인간다운 길은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자식이 굶어 죽는 가난에 한을 품고,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부자들을 타도하고 능력껏 생산해서 필요한대로 나눠 갖자고 선동하였다.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민중의 위세가 드높았다. 그런데 열정의 순간이 지나자 아무도 만족하지 못하였고 지상낙원은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여전히 독점하고픈 욕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평등은 모든 사람들이 기꺼이 나누는 게 아니라 욕구를 누르고 강제되어야했다. 공평하게 강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심 없는 초인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신과 같은 영웅은 조작될 수 있을 뿐 실재하지 않았다. 조작된 영웅을 정점으로 하는 절대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하였다. 베일에 가린 기쁨조와 비밀에 싸인 강제 수용소의 위협 하에 통제된 민중은 자유롭지 않을 뿐 아니라 평등하지도 않았다. 20%의 권력을 가진 이들이 80%의 민중들 위에 군림하였다. 인권은 부의 편중에서보다도 더 심각하게 짓밟혔다. 절대 권력의 통제 속에 살기는 부잣집 이웃에 살기보다 더 위태로웠다. 공산주의는 평등한 사회를 구현해 주지 못한다. 부의 불균형 대신에 권력의 불균형으로 바뀌게 할 뿐이다. 그것이 국가 경제의 어떤 파탄을 초래했고, 인권을 어떻게 유린하였는가는 한반도와 세계의 역사가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체제의 실험이 세계 역사상 명백한 실패로 끝난 오늘날에 우리 사회에 실패한 과거의 역사적 유물 같은 주장들이 횡행한다. 이것은 첫째로 부잣집 이웃에 살기의 고통은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과정을 겪어온 우리에게 체감된 직접 경험이지만, 절대 권력의 통제 속에 사는 고통은 휴전선 저쪽에서 일어난 간접 경험일 뿐이기 때문이다. 탈북자의 존재나 그들의 증언으로 드러나는 참상들도 자신이 직접 경험한 고통보다는 가볍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차에 치인 것보다 내가 바늘에 찔린 것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둘째로는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염원으로 남과 북이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 선동에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길은 무엇인가? 하늘이 명한 것이 성품이고, 성품을 따르는 것이 도(道)다. 퇴계선생은 사람의 마음은 피바다라는 가장 적나라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 마음에 지배당하지 않고 마음의 주인이 되어, 성인의 반열에 오르셨다. 사람의 마음과 사회적 현상들의 속성을 직시하여 사랑, 자비, 인(仁), 은총이 넘치는 사회를 추구해야할 것이다.

최태진 최태진신경정신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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