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이 타는 가을강. 벌써 아득히 이승과 멀어진 박재삼(朴在森) 시인의 한 절창이다. 올해도 가을은 어김없이 저 찰나의 절창을 타고 별안간 나의 삶으로 들어왔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영혼에 화살처럼 가을을 꽂아 버렸는지 모른다.
유년의 뜰에도 강물은 흘렀나 보다. 지금은 웅대한 용광로들이 끊임없이 쇳물을 토해내는 땅, 포항시 대송면 송정리 6반. 1968년 늦가을, 집단이주로 가뭇없이 사라진 마을. 만화책도 전등도 없이 오직 가난만 자욱한 모래바람처럼 푸짐했다.
어린 방향감각에는 남중자리의 반대편이므로 북쪽이라 여겼던 영일만 바닷가, 해가 넘어가는 편이므로 서쪽이라 믿었던 형산강 하구. 송정리 6반은 백사장도 수백 미터 안, 강둑도 수백 미터 안에 거느렸다. 갯마을이며 강마을이었다.
그해 가을 어느 해질 녘. 나는 찰랑이는 금빛 강가에 쪼그려 앉아 오동통한 종이배 하나를 쥐고 있었다. 개미의 눈에는 왕개미 수백 마리를 태워도 까딱없어 보였을 거대한 선박, 대체 거기다 아이는 어떤 소망을 싣고 있었을까?
오, 조그만 기구(祈求)의 손이 큼직한 욕망의 손으로 변신해 가는 지금, 나는 나의 손이 너무 커져서 도무지 그날의 간절했을 언어를 기억할 수 없다. 삶의 깊은 갈피에 화석처럼 간직돼 있으련만.
1970년 후반부, 대학시절에 나는 다시 강의 언어를 낚아 올리곤 했다. 서울 흑석동, 막걸리에 흥건히 젖은 몸으로 육교 하나를 건너가면 한강철교와 멀지 않은 한강이었다. 시(詩)와의 열애에 빠진 문학청년에게 한강의 한 귀퉁이는 어떤 근원을 들여다보는 문구멍 같았다. 얼마나 언어를 낭비했을까. '강' 연작시를 숱하게 읊어댔으니.
현재도 오붓하게 남은 연작시의 한 편은 '방뇨'이다. '청명한 가을 한낮/ 한강에 오줌을 갈기노니/ 일 주일 뒤 생일 아침/ 하숙집 식탁에 오를 숭늉이어/ 제발 내 오줌이길 비노라/ 아니면 오줌이어/ 목쉬고 캄캄한 저 강물의 노래에 스몄다가/ 저 노래들이 먼 바다에 모여/ 기어이 검은 바위로 솟아오를 때/ 새똥에 섞여온 풀씨 한 톨 뿌리내릴/ 옥토 한 줌을 일구어 다오'.
아마도 삐딱하게 서서 방뇨하며 연탄빛 강물을 바라보다가 넉넉한 막걸리오줌에다 요샛말로 '생태 지킴이'의 사명쯤을 부여했던 모양이다.
내가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과 진짜 만난 때는 서른 살을 앞둔 맑은 가을날이었다. 법학과를 나와서 고시에 이어 사랑마저 실패한 친구와 함께 강둑을 따라 형산강을 거슬러 오르다 문득 마주친 금빛 잔물결들.
강물의 울음이 타는 것이었다. 나의 가슴에서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가 산산이 부서지며 괜스레 더 서러워졌다. 이윽고 저문 강둑에서 나는 친구를 위로할 사람으로 싯달타를 불러 왔다.
'인도의 시'로도 번역된 헤르만 헤세의 소설. 기나긴 방황의 여정을 거의 마친 뒤에 이윽고 늙어 가는 주인공은 고요한 묵상 속에서 강물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늘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흐르는 강물을 이해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인생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깨달음에 도달한 싯달타, 마침내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창조물의 소리들이 이 강물 속에 있소. 만일 그 수천 가지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면, 강은 당신에게 무슨 소리를 하겠소?"
이 가을의 억새꽃이 찬란한 동안에 반드시 나는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러 갈 것이다. 바야흐로 친구의 서러운 사랑이야기를 콧노래 가락에 담으며 미소를 머금어도 좋다. 오래된 '방뇨'를 이젠 웅얼대지 않아도 좋다. 다만, 나는 먼 여행을 준비하는 것처럼 몇 가지 자문(自問)을 챙길 따름이다.
울음이 타는 가을의 강물이 나의 눈에 낀 이끼를 말끔히 씻어 서러운 눈물로 흘러내리게 할 수 있을까? 비밀의 소망을 실을 종이배를 새알처럼 가슴에 품고 저녁놀 물들은 강가로 다시 혼자서 걸어 나가는 날들이 언제쯤 내 삶에 돌아올 수 있을까? 흐르는 강물로부터 모든 창조물의 소리를 듣기 위해 자주자주 저무는 강가를 서성이는 날들이 나의 앞길에 기다리고 있을까?
이대환(소설가.민족문학작가회의 경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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