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지하의 사상기행-(13)강증산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전주 모악산(母嶽山)은 순창 회문산이 아비산, 양산(陽山)임과 대비해 어미산, 음산(陰山)으로 불린다. 그래서 모악산은 음개벽(陰開闢)의 성지로 회자되어 왔다.

이번에는 어미산, 음산, 음개벽, 후천개벽, 미륵, 용화 세계의 배경을 가진 모악산의 민중 사상사, 특히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격동과 전환의 시대를 휩쓸었던 동학 정역계 사상사의 한 절정에 관한 추억만을 말하고자 한다.

후천개벽 사상, 동학 정역계(同學正易系)사상사 중에서도 음개벽은 동학의 동세개벽(動世開闢)과 대비해 정세 개벽(靖世開闢)이란 뜻을 갖고 있다. 남성 중심의 개벽에 대응하여 여성 중심의 개벽이라는 점과 선천 시대의 우주 질서인 코스모스나 상극이 아니라 후천 시대 나름의 질서인 혼돈적 질서 또는 상생, 즉 '카오스모스'적 개벽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음개벽의 주창자요 실천자였던 강증산(姜甑山, 그의 공생활 기간은 1901년에서 1909년까지다)을 중심으로 한 모악의 문화가 지금에도 진행 중인 후천개벽, 즉 전 인류 문화사의 대전환에 있어서 후기 또는 그 절정에 속하는 여성 중심의 치유 처방에 의한 상생(相生)과 정세(靖世), 세상을 가라앉히는 사랑의 개벽 문화, 그래서 결국은 미륵 사상과 연결된다는 점에 초점을 둔다.

◇동학 정역계(東學正易系) 사상사

강증산은 이미 20대 초반에 열렬한 동학당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동학의 동세(動世) 개벽, 즉 무장 혁명에 반대했으며 갑오 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수십만 민중이 참살당한 뒤 그 가족 친지들이 극한의 고통을 겪고 있음을 목격하면서 3주야를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한다. 송장은 산천에 가득 쌓였고 비통한 원한은 구천에 사무쳤다. "날아다니는 나비조차도 그 날개에 원통한 피가 묻어 있다."고 그는 훗날 얘기한 바 있다.

이 죽임과 원한은 수운이 계시를 통해 얻게 된 세계 이해, 즉 '악한 질병이 세상에 가득 찼다(惡疾滿世)'와 같은 것이다.

증산이 수운을 "자기에 앞서 한 예언자, 치료자로 동토(東土)에 보냈다."고 말한 점, 수운의 '지기금지(至氣今至)'의 강령 주문이 바로 세상을 치유하고 통치하는 율려 주문(하느님의 치유 능력)이라고까지 말한 점으로 보아 증산사상의 원형이나 패러다임, 계열 역시 동학 정역계의 후천개벽 사상계열임을 분명히 알수 있다.

증산의 중요한 자기 명제 중의 하나가 '원시반본(原始返本)'이다. 동학 정역계 사상가가 모두 그렇다. 그러나 증산의 경우, 그 반본을 민중종교적 형태, 즉 '고대 종교(archaic religion)'의 틀을 취하며 민중종교적 상상력의 촉발을 위해 '미륵'이나 '용화'와 같은 미래 불교적 유토피아 사상을 흔히 활용한다.

그러므로 증산을 오늘날 신세대 중심의 새로운 문화 맥락 안에서 부활시키려고 할 경우 도리어 당시 민중에게는 적합성과 매혹을 가졌던 고태적(古態的)·미래 불교적 표현을 떼어내고 오히려 신세대가 갈망하는 담대하고 기이할 정도로 대우주적 상상력의 깊고 넓은 차원을 더욱 더 확대 심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천지굿

강증산의 9년간 공생활을 일관하는 사상의 특징은 남자보다 여자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남녀 균형, 질서보다 혼돈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혼돈적 질서, 상극의 선천 세계를 상생의 후천 세계로 의 개벽, 혁명하기보다 치료 및 의술(율려 포함)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先東學과 다른 後東學的) 세계 구원이다.

이른 시기에 강증산이 제자 김형렬에게 했던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세상의 숱한 아낙들이 하늘을 향해 염주 굴리는 저 소릴 들어봐라. 선천 수천 년간 남자들을 위한 부엌데기, 노리갯감 노릇을 하느라고 쌓이고 쌓인 원한이 구천에 사무쳤으니 하늘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찌 아낙들만의 세상이 되겠느냐?. 남녀 동등이겠지!"

분명 남성 중심의 수천 년 문명사는 어김없는 실패작이다. 무슨 놈의 문명이 제가 발 딛고 살고 있는 지구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문명이 있단 말인가.? 여성들의 역할이 강화되는 남녀 동등의 문명사가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주의 질서요 하늘의 결정이며 강증산의 확신이다. 그러나 강증산은 역시 깨달은 사람이다. 현실적인 남녀 동등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그동안 억눌려 있던 여성이 오히려 더 설쳐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 쪽으로 중심이 훨씬 더 기울어진 '기우뚱한 균형'이 우선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시 남성들이 개벽적 전환, 우주생명학적 권력 이동을 촉발하고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전라 정읍 대흥리에서 증산이 차경석의 이모인 과부 고판례를 만났을 때 한 말이다. "내가 수만 년 동안 너를 만나러 우주와 지구 모든 곳을 헤매었다. 이제야 동토(東土)에 이르러 너를 만났으니 천지 변화는 이미 다 이루었다. 너를 으뜸아낙(首婦)으로 하여 원시로 되돌아가는 용화(龍華)의 길을 펴리라!"

중요한 것은 원시반본이 여성 중심의 고대 회복이란 점이다. 우선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복이면서도 차이가 있는 반복, 창조적 회복이니 필경은 실질적인 남녀 동권일 것이라는 말이다.

증산은 정읍 대흥리에서 남자 제자 백여 명이 보는 앞에서 그의 사상 중 가장 중요한 '천지굿'을 집행한다.

먼저 고판례를 눕게 하고 자기가 그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 고판례에게 묻는다. "삼계 대권을 물려받을 준비가 다 되었는가?"

그리고는 다시 자기가 눕고 고판례로 하여금 자기 배 위에 올라타고 앉아 자기에게 식칼을 겨누며 호령하게 한다.

"삼계 대권을 지금 당장 다 내어놓아라!"

여기에 대해 증산은 두 손을 싹싹 빌면서 대답한다. "네에, 당장에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마당에다 성경, 불경, 사서삼경, 채권, 계산서, 공명첩 따위를 모조리 발기발기 찢어서 늘어놓고 고판례로 하여금 새시대 후천의 율려라고 이름 지어 붙이고'각설이 걸뱅이 타령'에 맞추어 그것을 짓밟고 다니며 춤추게 했다.

증산은 직후 제자들에게 말하길 "이것이 천지굿이니 오늘 이후 천지인 삼계의 큰 권력이 모두 아낙네, 여성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대들은 그것을 도우라!"

문제의 핵심은 오늘 문명에서 결핍된 여성성, 모성, 신체학 및 모심과 공경의 원리 등에 있다. 1901년에서 1909년 사이 그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이 '천지굿'의 현실적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도 이 뜻을 모른다면 그것은 바보든가 정신 이상이다. 도리어 여성 중심의 새 문명 건설을 남성 자신들이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최근의 담론이다.

그의 어록과 행장에 일관되는 파격의 의미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바로 그것이 그의 우주 사상의 기초로서의 혼돈의 질서이다. 그가 행한 여러 차례의 기적 역시 '우주적 혼돈 질서'였으니 아마도 대원사의 그 밤, 오룡이 포효하는 그 밤의 큰 깨우침의 내용이 곧 한마디로 '지기(至氣)' 곧 '카오스모스'가 아니었을까?

마지막 또한 그렇다.

단식과 독주(毒酒)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역시 하나의 우주 생명(스스로 옥황상제였기 때문이다)에 대한 재판 같은 집행이었으니 우주 질서의 조정이라는 그의 행적의 상징성이 품고 있는 비극적 진정성 앞에 모골이 송연할 뿐이다.

죽음 뒤에는 스스로 현대 문명의 땅인 서천(西天) 서양(西洋)으로 건너가 그 문명의 이기(利器), 혼돈기에 필요한 과학 등 온갖 물질문명(증산은 이 물질문명의 합법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생명학의 부재를 한탄하였다)을 모두 몰고 와 동양 문화, 후천개벽의 동학 정역계 사상과의 대결합으로 새 차원의 우주 문명을 건설하겠다는 세계사적인 성배(聖杯)의 소명을 서원하였으니 수운, 해월, 일부에 이어 증산은 동학 정역계 후천개벽 사상사의 절정요 한 송이 커다란 우주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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