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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 대서초교 1회 동창생 '50년만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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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따라 이 곳도 참 많이 변했네." "그래도 관풍루는 아직 그 자리에 있잖아." "야! 너하고 닭싸움 하던 자린데 기억 안 나냐?"

3일 오후 대구 중구 달성공원 관풍루 앞.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달성공원에서 문을 열었던 피란민 어린이들의 '대서 국민학교'의 1회 졸업생 74명 가운데 8명이 이 날 다시 달성공원을 찾았다.

이 날은 당시 자신들을 가르쳤던 최종진 옹의 팔순과 다가오는 스승의 날(15일)을 기념해서 가진 행사.

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전쟁이 한창인 때라 공부를 하려 해도 유네스코에서 지원한 국정교과서 뿐, 제대로 갖춰진 것이 없었다고 기억하는 이들.

최 옹은 소나무에 칠판을 걸어 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미군들이 쓰다 버린 기관총 탄피통은 아이들의 가방 겸 의자가 됐고 그들이 마신 빈 맥주 깡통(캔)은 두들겨 편 뒤 책받침으로 변신했다.

최 옹은 끼니를 굶어가면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부모들의 교육열이 대단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몸을 누일 집도 마땅찮았고 전쟁 와중에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야했죠. 그럼에도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오셨어요. 긴 나무판자를 구해와 돌을 받쳐 아이들 책상도 함께 만들었습니다."

개성 사범고교 출신으로 서울 광희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피란 길에 나섰던 최 옹. 당시 20대 중반이던 그의 열정도 학부모에 못잖았다. 박봉을 털어 산 학용품을 아이들에게 나눠줬고 굶기 일쑤인 아이들에게 국수를 사 먹였다.

제자 오수현(68) 씨는 아직도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소나무 그늘이 우리 교실이었습니다. 햇빛에 따라 그늘위치가 바뀌면 짐을 싸 그늘로 자리를 옮기곤 했지만 선생님은 제자리를 지키셨죠. 미군에게서 야전천막을 얻어 교실을 꾸민 사람도 선생님이셨습니다."

1952년 3월, 7개월이라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학교를 졸업한 뒤 동기들은 대부분 서울로 떠났다. 대서국민학교도 54년 문을 닫았다.

이들을 다시 모이게 한 것은 조원일(69) 씨. 서울서 중학교에 다니면서 틈만 나면 서울시내 학교를 돌며 수소문, 동기들과 최 옹을 찾아냈다.

어느덧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코흘리개 학생들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렸고 천막교실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무척 큰 어른'으로 보였던 최 옹도 이젠 제자들 눈에 '큰 형님'처럼 보인다. 제자들 역시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탓일까. 하지만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애정엔 변함이 없다.

제자 이경순(69) 씨는 "우리가 의사, 은행원, 사업가 등으로 커갈 수 있었던 것도 어린 시절 선생님의 끊임없는 사랑 덕분"이라며 "사제간 정이 자신들만 같다면 학교 붕괴 이야기도 안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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