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손님 기다리다 잠이 들었네"…포항 재래시장 '썰렁'

대목장 준비해 놓은 건어물상 골목 등 '적막'

"30년 장사에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새벽 6시에 문 열어 지금까지 멸치 한 마리 못 팔았어요." 1일 오전 9시쯤. 포항 죽도시장 한 건어물점 박 모(56) 사장의 입술은 말라 있었다. "매출이 작년의 3분의1도 안되는데, 친구나 친지들마저 괜히 앓는 소리 한다며 믿어주질 않아요. 미칠 노릇입니다."

전국 최대 재래시장 가운데 한 곳인 죽도시장. 예년 같으면 흥정하는 소리로 떠들썩할 때이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시장 안에 사람은 눈에 띄는 데 물건 살 '손님'이 들어오질 않아요." 상인들의 말은 한결같다.

◇팔 사람뿐 살 사람이 없다.

죽도시장에는 줄잡아 50여 개 건어물상이 자리잡고 있다. 상인들은 오징어·멸치·미역·김·새우 등 가지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상품을 준비해 대목장을 차렸다. 하지만 2시간 가까이 이 일대를 서성거렸는데도 손님은 20명도 안됐다. 고객으로 발디딜 틈이 없어야 할 오전 10시를 전후한 한 때는 상인들마저 지쳤는지 움직이지 않으면서 적막하기까지 했다.

민어·돔·조기 등 갖가지 생선이 진열된 제수용 생선점들과 청과물상도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청과물상을 하는 김옥분(69) 씨는 "수십년 단골도 나타나질 않는 걸 보니 올해는 차례상을 차리지들 않을 작정인 모양"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인들은 잡담이나 주고 받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신세대 주부들은 물론 중년층들도 인터넷·TV 홈쇼핑을 통해 제수용품을 구입하면서 가뜩이나 백화점·대형 유통매장에 손님을 뺏긴 재래시장이 설자리는 더욱 좁아지고 있다. 죽도시장에서는 활어·선어를 파는 수산물 공판장에만 평소보다 다소 많은 손님이 몰렸으나 "매기가 없다."는 말은 다른 골목과 같았다.

◇늘어나는 노점상, "할배 담뱃값이라도 마련해야지."

죽도시장의 남쪽 도로변에는 시장 안 상가만큼이나 많은 노점상들이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60∼80대 할머니들로, 집에서 직접 수확하거나 잡은 농수산물을 조금씩 들고 나왔다. 병원 입구 계단을 호박 파는 할머니에게 내줬다는 한 개업의사는 "2, 3년 전만 해도 노점상이 40, 50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500명도 넘는 것 같다. 다들 어렵다는 증거 아니겠느냐."라며 씁쓰레한 표정을 지었다.

청하면에서 이날 새벽 애호박 6개, 얼갈이 배추 2단, 고추잎 두 바가지, 가지 열개를 들고 나왔다는 홍 모(76) 할머니는 "김밥 1줄 사먹고 1만3천 원 남았다. 그래도 이거라도 없으면 우리 영감 담배 굶을 판이니 어떻게 해?"라며 버스정류장으로 바쁜 발걸음을 옮겼다.

흥해읍에서 얼갈이 나물 몇 가지를 들고 나온 정 모(70) 할머니는 손님을 기다리다 지쳐 아예 한잠이 들었다. 옆자리 할머니는 "물건 못팔면 밥도 안 먹는다며 저렇게 버티고 앉았다."며 정 씨에게 손짓을 했다.

◇선물은 생략, 차례상은 간단하게

지역의 한 중소 기업인은 올 추석을 앞두고 큰 마음을 먹었다. 매년 해오던 1천만 원 어치의 명절 선물을 하지 않기로 한 것. "주면 받는 게 명절 선물인데, 안 주고 안 받자는 말이 동료 기업인들 사이에서 몇 번 나온 뒤 이를 내가 먼저 실행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늘면서 죽도시장의 명절선물 주문은 작년 대비 80%나 줄었다는 말도 나온다.

주부들도 씀씀이를 줄이기는 마찬가지다. 남편을 대신해 직장 상사와 거래처 등에 매년 제수용 생선과 문어를 선물해온 주부 나윤경(42·포항 대이동) 씨는 "올해는 생략"이라고 했고, 주부 김모(58) 씨는 "차례상 비용으로 10만 원만 책정해 한 가지씩 간단하게 차리기로 했다."고 했다. 시장 안에 사람이 없는 이유다.

이미 주문해 놓은 조기와 민어 등을 어떻게 소화해내야 할 지 고민이라는 생선가게 주인 김무생(58) 씨는 "돈과 사람, 다들 어디 가 있는지 몰라. 돈도, 사람도 구경조차 힘드니… 그래도 단대목엔 좀 나아지겠지."라며 기대감을 버리지않았다.

사람과 상품으로 넘쳐나야 할 추석 대목 밑 죽도시장이 올해는 썰렁하기만 하다. 불경기에 골병든 시민들의 속사정이 장바닥에 그대로 드러난 듯 했다.

포항·박정출기자 jcpark@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