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성석제씨가 새 소설을 내놓았다. '참말로 좋은 날.' 제목부터 웃긴다. 이전에 그의 작품을 많이 읽었던 터라 책을 펴기도 전에 웃음부터 나온다. 키들키들 웃다보면 눈물과 연민과 비애를 만나게 되는 게 그의 소설이다. 이번에도 즐거운 예감 속에 책장을 넘겼다.
좋은 작가란 이런 게 아닐까. 독자를 상대로 사기 치지 않는 것. 새로 낸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게 하지 않도록 보증하는 힘. 성석제는 '우리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이란 수식어를 가진 작가답게 이번에도 이야기꾼의 입담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이야기를 힘들게 짜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면, 성석제는 '근질거리는 입'을 단속할 수 없어 쏟아내는 느낌을 준다.)
하여간 성석제에게는 너저분한 일상을 존재의 숭고한 미덕으로 끌어올리는 힘이 있다. 그렇고 그런 일상에 유머와 아마추어 폭력을 곁들이되, 인간군상을, 존재를 그리고 삶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특히 이번 소설집 속의 단편 '악어는 말했다.'는 이전의 작품들이 보여준 웃음과 농담, 그 뒤에 숨은 삶의 비애와 슬픔을 유감 없이 보여준다.
그런데, 이번 소설에는 뭔가 다른 기운이 감돈다.
'참말로 좋은 날'….
제목은 그가 이전에 보여준 '유머와 웃음과 비애'를 동시에 담고 있는데 그 안의 내용물은 변하고 있다. 뭐랄까. 몇몇 단편들은 '칼로 뼈와 살을 발라내듯' 차갑다. 오직 존재와 존재에 대한 부정이 있을 뿐 유머가 끼여들 틈이 없다.
신문과 방송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우리가 견디는 비결은 무엇일까. 이를테면 누가 누구를 죽이고, 누가 누구 집에 불을 지르고, 자식이 부모를 때리는 사건들…. 바로 인근에서 누군가가 죽어 엎어졌는데도 우리가 스트레스로 말라죽거나, 공포에 짓눌려 방구석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싸돌아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글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신문방송 속 사건과 사고에 무덤덤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신문이나 방송이 전하는 소식은 결과를 알리는데 주력하며, 당시 상황을 전달한다고 해도 간단하게 언급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찰나에 발생한 사건과 사고는 사실 그 이전에 인과관계를 갖기 마련이다. 또한 찰나의 사건과 사고 후에도 인과적 결과가 이어지기 마련이다. 우리가 수많은 사건과 사고, 염치없고, 예의 없고, 차마 눈뜨고 볼 수 없고, 밤잠을 설 칠 수밖에 없는, 한마디로 넌덜머리나는 사건사고들 속에 살면서도 스트레스로 말라죽지 않고 푸르게 푸르게 살아가는 것은 '결과'만 간단히 듣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사건의 전후 사정을 모조리 알고, 그 현장을 고스란히 들여다본다면 어떻게 될까. 예컨대 '불나서 홀랑 다 태웠다더라'가 아니라 불이 나게 된 과정, '전세금 홀랑 날렸다더라'가 아니라, 어떻게 전세금이 눈앞에서 몽땅 날아갈 수가 있는가, '누구네 집 자식이 아비의 목을 졸랐다더라'가 아니라, 어째서 그런 일이 벌여졌는지를 직접 보게 되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건과 사고 현장을 보는 것은 정신건강에 나쁠 것이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사건과 사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흉한 장면을 직시하는 것이 미래의 흉한 일을 막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성석제의 이번 소설은 (그런 의도로 쓴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확실히 '당신도 눈 똑바로 뜨고 봐야 해!' 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 소설 '참말로 좋은 날'에는 7편의 중·단편 이야기가 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살육전을 벌이고, 아내가 연립주택 4층에서 뛰어내리고, 자동차는 다리 난간에 걸려 떨어지려는 순간이고, 고문과 매질에 숨이 넘어가고, 집에는 불이 나고, 전세금을 떼이고, 보일러 기름이 떨어지고 수도가 끊어지고….
당장 오늘 일이 급하다. 내일 해는 뜰지 안 뜰지 모른다. 한마디로 난리법석이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 누구나 그런 형편이 아니겠는가. '참말로 좋은 날'이라는 이 소설의 제목은 그래서 슬픔과 고통과 쓸쓸함을 더한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벼랑 끝 대화와 사건이 '참말로 좋은 날' 벌어지는 일이라니.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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