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산사(山寺), 성주 선석사
비가 내린다. 날마다 雨요일이다. 장마다. 햇살이 반짝 비치다가도 갑자기 "우르르 쾅"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게 장마철. 이럴 때일수록 우울해지기 쉽다. 방구들을 뒹굴기보다 가까운 곳의 비에 젖은 산사(山寺)라도 찾아보자.
비내리는 풍경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디지털카메라라도 갖고 나서면 한폭의 수채화다. 한적한 시골 국도를 달리면서 유리창을 빗금처럼 그어내리는 빗줄기는 또 얼마나 시원스러운가.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를 와이퍼로 쓸어버리면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주제곡인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B J Thomas)같은 1970년대 팝을 볼륨을 높인 채 들으면서 드라이브를 하는 건 색다른 맛이 난다. '유리창엔 비'나 '비처럼 음악처럼' 같은 우울한 노래보다는 훨씬 낫다. 경쾌한 록이 아니라면 재즈블루스풍의 '미친 듯 살고싶다'(Bobby Kim)를 듣는 것도 괜찮다.
도심을 빠져나와 이 빗길을 뚫고 어디로 갈까. 한적한 국도변에 고즈넉한 분위기의 절이 있다면 빗속 드라이브로는 최고의 코스다. 시끌벅적한 사하촌(寺下村)도 없고 입장료도 받지 않는 절을 찾아 나섰다.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자락에 선석사(禪石寺)가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신라천년 고찰이지만 조선시대에 200m 옆에 '세종대왕자태실'이 들어서면서 태실수호도량으로 지정되기도 한 유서깊은 절이다.
그런 유명세와 달리 절은 크지 않고 소박하다. 대웅전과 명부전, 삼신각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가로로 나란히 배치돼 있고 빗줄기 한가운데에 범종각이 서 있는 모습이 운치가 있다. 입구도 없이 절마당 한쪽에 서있는 일주문의 자태는 비맞고 서있는 아낙네의 자태 같다.
일주문을 들어서다가 가랑비를 맞으면서 강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합장하자 스님은 차 한잔 하고 가라고 이끌었다. 주지 스님이었다.
선방에 앉으니 물끓는 소리와 대웅전 기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어울린다. 이런 고즈넉한 산사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스님이 청하는 차 한잔 마셔본 기억이 언제였던가. 빗소리에 취해 있을 때 산 속에서 갑자기 목탁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소리는 산 속이 아니라 지척간인 대웅전에서 난 것인데도 빗소리 때문인지 아득한 소리다. 속간(俗間)을 떠난 듯하다. 빗줄기 사이로 언듯 목탁치는 스님의 모습이 비친다. 차를 마시는 나그네는 속간에 있지만 차를 따르는 스님은 절간에 있다.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산사라면 그 어느 곳인들 어떠랴. 스님은 이곳은 누구나 차를 마실 수 있도록 차방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절 입구에 자리 잡은 작은 연못은 온통 흙탕물이다. 햇살이 비칠 때는 활짝 꽃잎을 열었을 연꽃 서너 송이가 내리는 빗줄기에 입술을 닫은 채 불어난 물에 잠겨 있다.
혜만 주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은 윤회를 믿습니까?" 허허 웃던 그는 "부처의 삶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 라고 말했다. 스님의 어눌한 말투가 마음을 편하게 했다. 속세와 천당과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스님이 살고있는 절이나 우리가 살고있는 도시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듯 말이다.
절 입구에 나붙은 '태장전' 건립불사 현수막에 대해 물었다. '요즘은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세상' 그래서 그 소중한 자녀의 태를 이곳에 보관하고 기도하기 위한 불사(佛事)라고 말했다.
잠시 그쳤던 빗줄기가 다시 내리 긋기 시작했다. 절이 젖었고 스님도 젖었고 대웅전 안의 부처님도 젖었다. 빗소리와 목탁소리도 젖었다. 마음까지 젖어들기 전에 서둘러 차에 올랐다. 하긴 점심공양 때가 되어도 보살이 없는 이 절에서는 점심 얻어먹기 어렵다.
서명수기자 diderot@msnet.co.kr
세종대왕태실
▶ 세종대왕태실…전국 유일 '완전 群集'
선석사 왼쪽 태봉에는 세종대왕태실이 자리 잡고 있다.
세종대왕태실은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있다. 태실은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항아리에 넣어 묻어둔 곳이다. 사적 제444호로 지정돼 있다. 현재는 19기 중 14기가 당시의 모습 그대로지만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은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됐다.
세조 태실은 세조가 왕위에 즉위한 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 가봉비를 태실비 앞에 세워 둬 두드러진다.
조선왕실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길지를 찾아나서 태시리로 선정된 곳이 바로 이곳 성주의 태봉 태실이다. 당초 이곳에는 성주 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의 묘가 있었다. 하지만 왕실에서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이장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사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이다. 선석사를 찾는 길에 함께 세종대왕태실을 둘러보고 주변 산세를 바라보면서 우리 주변의 풍수지리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서명수기자
▲ 귀가길 성주댐 낭만 드라이브
비가 계속 내릴 때는 선석사를 나와 성주읍내를 거쳐 성주댐 쪽으로 차를 돌려보자.
성주댐 주변 도로는 비내리는 호수를 바라보면서 드라이브하기 좋은 코스로 각광을 받는 곳이다. 장마에 앞서 수문을 개방해 수위가 낮아졌지만 물이 차면 물이 찬 대로, 물이 빠져도 호수다운 운치가 나는 곳이다. 배가 출출하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포장마차에서 옥수수 등 간식거리를 먹을 수도 있다. 무주 쪽 상류로 올라가는 도로가 훨씬 운전하는 맛이 난다. 성주댐은 1995년 완공된 다목적 댐이다. 댐 아래쪽에는 매운탕식당도 몇 군데 있다.
댓글 많은 뉴스
나경원 "李 장남 결혼, 비공개라며 계좌는 왜?…위선·기만"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
주진우, 김민석 해명 하나하나 반박…"돈에 결벽? 피식 웃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