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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김훈의 '칼의 노래'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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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포구엔 임금 울음소리만 맴돌 뿐…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노엽지 않은가. 그대를 조선군의 수괴라 부르는 적보다 역도라 칭하는 군왕이 더욱 노엽지 않은가. 그 불의에 맞서지 못하고 그대의 함대를 사지로 이끌고자 한 세상의 비겁이 노엽지 않은가. 칼은 살뜰하게 내게 보챘다. 적의 피로 물든 칼을 동족의 심장에 겨누지 마라. 그 무슨 가당치 않은 오만인가. 어찌하여 노여움을 참고 있는가. 이 바다에서 수많은 적에게 겨누었던 그 칼을 그대의 노여움에 겨누어라. 내가 진정 베어야 할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 자신이라고 칼을 달래고자 했으나 그 울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하여 차라리 육신이 죽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이내 몸은 죽어지지 않았다.(드라마 대본 부분)

전남 장흥군 회진항에 왔다. 전혀 도시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 곳. 득량만 서쪽 입구에 있는 노력도 북서쪽 포구 내에 위치한 껄쭉한 남도 사투리가 정겹게 깔려있는 곳. 회진과는 제법 인연이 많다. 소설가 이청준과 한승원의 고향바다로 그들의 자전적 소설 속에 그대로 그려진 정겨운 곳이다. 이청준의 '눈길'과 한승원의 '새터말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서 몇번이나 방문한 장소다. 여전히 허름한 선술집이 존재하고 투박한 아주머니의 입담과 노래 한자락도 살아 숨쉬는 회진. 사실 오늘 내가 여기에 온 것은 통제사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우연히 포구에서 만난 회진읍사무소 공무원 아주머니가 반가워한다. "선생님께서 또 웬일이세요?" "'칼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요." 무척 생뚱맞은 표정으로 웃음을 보낸다. 늘 아이들과 함께 오다가 혼자 들른 것도 의아한데 '칼의 노래'라는 표현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사실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회진과 통제사와의 관련성을 거의 알지 못한다. 여기가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 송기숙의 고향인 건 알지만 통제사가 백의종군 후에 새로운 시작을 알린 곳임은 잘 모른다. 그것이 쓸쓸했다. 옥포 당항포 당포 통영 한산도 노량 관음포 명량 그 모든 곳에는 통제사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여기는 흔적을 별로 찾을 수 없다. 쓸쓸한 선술집과 바다만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래서 여기가 좋다. 통제사의 쓸쓸함을 만날 수 있으니까. 내 쓸쓸함에 그의 쓸쓸함을 대응시킬 수 있으니까.

임금은 자주 울었다. 압록강 물가에서 우는 임금의 울음은 조정 대신들과 선전관, 명군 총병부 관리들의 입으로 퍼졌다. 임금의 울음은 남쪽 바다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슬피 울었고, 오래오래 울었다. 임금은 버리고 떠난 종묘를 향해 남쪽으로 울었고 북경을 향해 울었고 해뜨는 동쪽을 향해 울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김훈, '칼의 노래' 부분)

선조의 유일한 권력은 언어와 울음이었다. 모함으로 인해 수많은 고초를 겪은 통제사의 몸은 이미 인간이 지닌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칠천량 해전 참패로 해상권을 상실한 조선 조정에서는 백의종군 중이던 통제사를 다시 1597년 9월 13일(양력)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했다. 하지만 통제사에게는 합천 구례 곡성 순천 등을 거쳐 모집한 겨우 120여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통제사가 부흥의 꿈을 새로이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회진(회령포)이었다. 통제사는 장흥 회진에 도착하여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해서 남은 배 12척을 수습하고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과 합류했다. 두달에 거친 옥고와 고문, 자신의 몸과 같았던 조선 수군의 전멸 소식, 합천에서 회진까지의 고통스러운 행군. 통제사의 몸은 전장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병상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통제사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지켜야 할 조선과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깃배가 포구를 떠나고 있었다. 지금 회진에는 절망 속에서 다시 전의를 다지던 높은 함성보다도 통제사의 신음과 쓸쓸함이 남아 있다. 그 쓸쓸함 속에는 임금의 울음만 존재했지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통제사의 칼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덩달아 쓸쓸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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