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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김훈의 '칼의 노래'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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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포 첨망대에 서서 바람을 맞았다. 몇 그루의 대나무가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내 마음 한쪽에서도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쓸쓸했다. '칼의 노래' 마지막장을 열었다. 언어는 통제사만큼이나 절박했다.

나는 대장선 장대에서 소리쳤다.

- 관음포가 급하다. 관음포로 가자.

그때 적선 2척이 내 대장선 앞뒤로 달려들었다. 난간에 도열한 적들이 일제히 무더기로 쏘아댔다. 갑자기 왼쪽 가슴이 무거웠다. 나는 장대 바닥에 쓰러졌다. 군관 송희립이 방패로 내 앞을 가렸다. 송희립은 나를 선실 안으로 옮겼다. 고통은 오래 전부터 내 몸속에서 살아왔던 것처럼 전신에 퍼져나갔다. 나는 졸음처럼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죽음을 느꼈다.

-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너는 내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내 갑옷을 벗기면서 송희립은 울었다.

- 나으리, 총알은 깊지 않습니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총알은 임진년의 총알보다 훨씬 더 깊이, 제자리를 찾아서 박혀 있었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팔다리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 송희립은 갑옷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북을 울렸다. 난전은 계속 중이었다. 싸움의 뒤쪽 아득한 바다 위에서 노을에 어둠이 스미고 있었다. 나는 심한 졸음을 느꼈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김훈, '칼의 노래' 부분)

관음포에는 갈라진 섬들이 말없이 떠 있었다. 통제사의 선택을 되새겼다. '나는 안다. 총알은 깊다.' 김훈의 언어가 매섭고도 깊다. 총알은 깊다. 발끝에서 시작된 울음이 가슴을 거쳐 입과 코로 쏟아져 나왔다. 통제사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눈물겨웠다. 오랫동안 관음포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통제사의 그것에 비하면 지금까지 내가 겪은 슬픔이나 아픔, 그리고 쓸쓸함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가 바람 속에서 통곡하는 소리를 아득하게 들었다. 내 등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하는 매서운 칼의 노래를 들었다. 다시 쓸쓸했다. 난 선택의 기로에서 늘 통제사의 선택을 떠올렸다. 사실 통제사에게는 퇴로가 없었다. 어쩌면 퇴로가 존재했던 적들보다도 더 불행했던 셈이다. 결국 통제사는 적의 퇴로를 끊는다. 그리고 죽음을 맞는다. 그것이 통제사의 유일한 퇴로였던 게다. 그러면…나의 퇴로는? 최소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통제사보다는 행복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내가 품었던 어떤 알들도 부화하지 못했다. 결국 난 단 한번도 새가 되어 비상하지 못했던 셈이다. 문득 칼로 베어지는 적을 지닌 통제사가 역설적으로 부러웠다.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스스로 자신만의 자연사를 선택한 통제사가 부러웠다. 아니다. 이런 마음의 흐름조차 사치이다.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은 오히려 통제사에 대한 한없는 부끄러움이리라. 가장 먼저 싸워야 할 적이 바로 자기 자신이며, 민초를 하늘로 알고 마음을 다하여 섬길 수 있는 마음일 때 나는 진실로 통제사를 부러워할 수 있으리라.

이제 통제사와 함께한 내 여행의 기록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행복했다. 여행 동안 늘 쓸쓸했던 기억조차도 행복했다. 수많은 불가능에 도전하고 깊은 절망과 싸우면서도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통제사의 길을 그의 마음과 함께 걸어보았다는 것이 행복했다. '칼의 노래'를 덮었다. 그러다가 다시 첫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섬들은 바다에 박힌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싶었다.

한준희(경명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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