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장옥관의 시와 함께] 가을 일기/이구락

햇살은 낮은 목소리로, 바람은 따뜻한 걸음으로 하오의 언덕 넘어 왔다. 먼 데 사람 생각나는 초가을, 잘 익어가는 잡목숲 속 조그만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키큰상수리나무사이생각에잠긴새털구름바라보고파이프를두번이나청소하고앉은채바지단추열고오줌도길게누고오래숨멈추고싸리나무가들국화에게수작거는소리엿듣기도하고가까이서들리는새소리에화들짝정신들기도하고성냥개비끝다듬어아무도모르게그리운이름아까시잎뒷면에가만히써두기도하고―― 이윽고 새소리 그치고 날빛 흐려 저문 산 마주보며 내려왔다. 내려오며 두 번을 돌멩이에 걸려 휘청거렸고, 다섯 번을 뒤돌아보았다. 마을로 가는 굽은 길 끝엔 흐린 별빛 두어 점 풀잎 위에 앉아 있었다.

'낮은 목소리'와 '따뜻한 걸음'의 주어가 바뀐 건 아닌가. 햇살에 어찌 '목소리'가 있겠으며 초가을 바람의 걸음에 어찌 '따뜻함'이 있으랴. 전도된 감각. 멀쩡한 사람에게도 감각의 교란이 생길 수 있는 계절이 가을이다. '싸리나무가들국화에게수작거는소리엿'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이 예민해지는 계절이다. 그렇기에 우리 일상은 자주 '돌멩이에 걸려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것.

휴일에 산을 올랐으면 운동이나 하고 바로 내려올 것이지 어쩌자고 날 저물도록 넋 놓고 옛 생각에 젖어드시는가. 아무리 떠올려 봐도 단 한 발자국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데 우리는 왜 자꾸 옛일에 집착하는가. 옛사랑이 떠오르거들랑 '바지단추열고오줌' 한번 길게 누고 산을 내려오자. 새털구름에 맡겨둔 정신을 화들짝 찾아오자. 된장찌개 보글보글 끓는 저녁 식탁으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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