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의 파리에서 만난 사람] 바람구두의 사나이, 사진작가 한성필

▲ 파리의 거리에서 촬영 중인 한성필 작가.
▲ 파리의 거리에서 촬영 중인 한성필 작가.
▲ 방진막 사진 앞에 선 작가.
▲ 방진막 사진 앞에 선 작가.

그날 바스티유 광장에는 대낮의 햇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지만 작은 회전목마 옆 그늘은 추웠다. 약속시간 십 분이 지나도록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고, 걸려오는 휴대전화는 자꾸 끊겼다. 파리에 도착한 지 채 하루가 되지 않은 점심 녘이었다. 수수께끼의 '철가면'과 볼테르, 미라보 백작 등이 수감되었다던 바스티유 감옥 자리에 선 하늘색 혁명기념탑이 점점 을씨년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회전목마가 아닌 것은 아닐까.

그때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고, 기다리던 사진작가 한성필씨가 맞은편 도로에서 전화기를 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전철역을 한 정거장 앞서 내린 것이었다.

우리는 바스티유광장에서 전철 1구간 거리인 파리의 작은 섬 시테로 걸어갔다. 반복적으로 깔린 하얀 포석 위로 햇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나는 그 청년이 시골에서 갓 파리로 올라왔을 거라는 추측을 해냈고, 한성필씨는 화관(花冠)처럼 빙빙 돌아가는 커다란 생폴 광장의 회전목마를 가리키며 웃었다.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기증했다는 조개껍질 성수대가 입구에 놓여있는 생 폴 생 루이교회를 지나 도착한 파리국제예술공동체(Cite Internationale des Art) 안의 그의 작업실은 센 강이 보이는 2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미술,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작업하는 공간입니다. 지난 1996년부터 삼성문화재단에서 아틀리에를 장기로 임대해 한 해에 한 명씩 작가를 선정하여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2009년 3월까지 제가 수혜자로 선정되었지요." 서울에서 공수돼 온 갖가지 나물로 직접 비빔밥을 만들어 점심 식사를 준비해둔 식탁으로 안내하며 그가 말했다.

작가들 사이에서 한성필씨의 별명은 국제 미아다.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는 말이다. 1992년 한국외국어대 독일어학과를 수료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 런던의 킹스톤대학 및 디자인 미술관 공동 석사 프로그램인 큐레이팅 컨템퍼러리 디자인 과정을 졸업했다. 그 후 그는 유네스코 아쉬버그 레지던스 과정을 통해 인도네시아, 프랑스 문화성 후원으로 프랑스, 시리우스 아트센터 레지던스 과정으로 아일랜드 등을 돌며 끊임없이 새로운 사진작업을 했다. 한때 라이따이한, 고산족, 정글을 촬영하기도 했던 그는 앞으로 남극과 북극 그리고 가능하다면 달까지도 가서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삶을 탐사하는 노마드(유랑자)인 셈.

"열다섯살 때 처음 바다를 보았어요. 경이로움 그 자체였지요. 그 느낌을 간직한 채 오래도록 바다를 찍어 왔고, 초현실성을 가미해 미국, 독일, 영국, 인도네시아와 슬로바키아에서 'The Sea I dreamt' '나의 바다' 등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바다를 주제로 한 사진의 프레임 속엔 초현실화와 마주한 듯한 감성을 자아내는 이미지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러한 기존의 그의 사진들은 최근 3년간 미국, 슬로바키아 등의 국제 사진 축제를 비롯하여 미국, 일본, 아르헨티나, 영국, 독일 등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소개되어 큰 호평을 받은 바 있으며, 해외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엔 원자력 발전소의 연기와 하늘을 소재로 'Ground Cloud' 연작을 촬영했지요. 그러다가 2004년 방진막을 보게 되었습니다." 방진막, 건물을 짓거나 수리할 때 먼지를 막고 어지러운 공사현장을 가리려고 설치한 가림막이다. "당시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의 방진막은 공사 후에 말끔해질 이미지를 실물 크기 그대로 프린트해 씌운 것이었지요. 그 웅장한 스케일과 미학적 요건에 압도되는 순간이었어요. 사람들이 그 앞에서 데이트를 하고 기념사진을 찍더군요. 그렇다. 공공미술이란 이렇게 즐거운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부터 그는 세계 곳곳의 방진막을 씌운 건물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진들로 'FA ADE:face-cade전'을 열었다. 동료작가들과 평론가들의 환호성을 자아낸 작품들은 대기업의 달력으로 제작되었다. 무엇보다 펼쳐진 책들과 사람들이 드나드는 대형서점의 방진막을 찍은 사진 앞에서 나는 한참 넋을 잃었다. 복제된 실제, 재현된 실제, 아니 복제의 복제인가. 그런데 그 복제나 재현이 오히려 자연광과 인공광에 어우러져 실물보다 더 실제 같았다. 들뢰즈의 시뮬라크르가 확실하게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다방면에 관심 이상의 식견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종이로 만든 박물관 페이퍼테이너의 이야기에서 최민식, 스티글리츠, 카르티에 브레송, 앗제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미술과 문학에 대한 견해도 전문가 이상의 수준이었다. 사진 촬영뿐만 아니라 현대예술의 진정성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 타 장르의 지식창고까지 바람구두를 신고 누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작업과 작품에 대한 신념도 철저하리 만큼 남달랐다. 자신의 작품 소장자들과 미술관을 위해 에디션 관리도 철저하게 한다고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대구 사진 비엔날레의 메인전시에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파리와 대구에 대해서 물었다.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당시 문화예술인구의 유입과 그들의 파리 거점화는 파리를 세계문화예술 중심지로 만들었고, 그것은 이후 파리에 더할 수 없는 영광과 더불어 부를 안겨주었습니다. 현재도 그 당시 예술가들의 흔적만으로도 도시 재정이 충분히 충당될 만큼 관광객과 유학생들로 넘쳐나지요.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그 위대한 당시 예술이라는 벽을 뛰어넘을 수 없도록 만들어, 새롭고 실험적인 예술이 태동되기에는 그 토양과 환경을 척박하게 만든 점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 결과 뉴욕과 런던, 베를린에 비해 새롭고 실험적인 예술작품의 파리 정착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는 현대예술, 특히 사진 부문에서 충분한 저력을 가진 도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민들의 열기가 아주 뜨겁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더 좋은 작품, 즉 상품성의 측면에서 양보다 질을 따질 수 있는 작품과 좋은 작가의 발굴과 육성은, 그 작가가 가진 역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국가의 문화예술 지원 시스템에 좌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포츠 산업에의 투자와 문화예술 관련 투자를 비교해 보면 그 나라의 미래가 밑그림으로 그려진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프랑스의 경우에도 국립묘지 격인 팡테옹에 철학자와 작가들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요. 서구 각국의 이러한 문화 예술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이 참 부럽습니다."

덧붙여 1730년 기업가 페랑 드 모라의 저택이었다가 앙리 마티스, 이사도라 던컨, 마리아 릴케 등 유명한 예술가들을 거쳐 로댕에게 임대되고, 1919년 정부에 의해 국립 로댕 미술관으로 지정된 예를 들며 문화예술에 대한 유연한 행정적 접근과 무엇보다 기업들의 문화예술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사진작가 한성필씨는 오늘도 파리나 런던 또는 유럽의 어느 시골길에서 낡은 도요 필드 카메라로 촬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박미영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 약력

1972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대 예술대학 사진학과 졸업

2004년 런던 킹스톤대학 및 런던 디자인 미술관 공동 프로그램 큐레이팅 컨템포러리 디자인 석사과정 졸업

◆ 개인전

2002년 바다에서 꿈꾸다(서울)

2004년 The Sea I Dreamt(미국 텍사스)

2005년 Displaced Spaces-'Blue Jungle'(인도네시아), My Sea(독일 프랑크푸르트)

2006년 The Sea I dreamt(영국 런던)

2007년 FA CADE:face-cade(서울)

2008년 再現:製現(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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