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처럼 성공에 비해 실패의 확률이 높은 것이 타자의 숙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라운드에서 유난히 미소가 가득한 선수가 박석민이다. 슬럼프조차 사라지게 할 것 같은 그의 해맑은 미소와 끼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이미 여섯 살에 삼성 라이온즈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니 어쩌면 그의 미소는 오래 전부터 준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그도 한동안 미소를 잃었었고 웃음을 다시 찾기까지 긴 여행이 필요했었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매사에 긍적적인 박석민은 활발하고 웃음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이범호의 뒤를 이어 대구고의 3루수를 맡으며 고교 시절 일찌감치 대형 타자로 주목을 받았던 그였지만 막상 2004년 꿈에 그리던 삼성에 입단하니 눈앞의 벽은 높기만 했다. 3루엔 베테랑 김한수, 유격수 자리와 2루엔 한창 물오른 조동찬과 막 자유계약선수(FA)로 이적해 온 박종호가 있어 백업 요원으로 벤치를 지키기 일쑤였다.
조금씩 출장 기회를 얻긴 했지만 여느 신인들처럼 뭔가 보여주겠다는 조급한 생각이 앞서면서 결과가 좋지 못했고 1, 2군을 들락거리는 사이 어느덧 2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느긋했던 마음도 점차 여유가 사라졌고 자신감도 조금씩 퇴색돼 갔다. 의기소침한 그에게 2005년 겨울 한대화 코치가 군 입대 제의를 했다. "제대할 무렵이면 박종호와 김한수도 FA가 끝나니 그때는 기회가 오지 않겠어? 차라리 이참에 입대해서 분위기를 전환해 보는 게 어때?"
탈출구를 찾던 그는 주저없이 상무행 열차를 택했다. 사실 그때까지 고교 시절 알루미늄 배트로 칠 때의 타격 습관이 남아 있었다. 나무 배트에 적응하기 위해선 타격 때 임팩트의 위치를 수정해야 했다. 고된 개인 훈련이 반복됐다. 밤낮 없는 웨이트 트레이닝과 함께 조금씩 나무 배트에 적응하자 비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록 2군 경기였지만 2007년 20홈런을 넘어서자 비로소 타격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해 11월7일은 오랜 기다림 끝에 그가 예전의 미소를 되찾은 날이었다. 상비군 대표로 출전해 베이징올림픽 대표팀과 가진 연습경기에서 류제국을 상대로 3점 홈런을 터트리며 궤도에 오른 타격 능력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맞은 편 더그아웃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짓는 선동열 감독이 시선에 들어오자 자신감은 더욱 뜨겁게 달아 올랐다. 언젠가는 기회가 올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버틴 2년의 고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이범호와 박석민, 걸출한 두 제자를 길러낸 박태호 대구고 감독은 말했다. "둘의 차이는 별로 없어요. 다만 범호가 지독한 연습으로 수준에 도달했다면 석민이는 타고난 천재성으로 궤도에 올랐죠." 어쩌면 뛰어난 자질을 믿고 서두르다 낙담했지만 제대 후의 박석민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스스로의 믿음으로 거듭난 라이온즈 중심 타자의 올 시즌 활약을 기대해 본다.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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