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雲門에서 華岳까지](3)정맥 들머리 풍경

해발 100여m 아화고개, 금호강-형산강 물길 당당히 분계

날개같이 펼쳐진 오봉산-사룡산. 사진 왼편 봉우리 다섯 개 있는 산이 오봉산, 오른쪽 끝 봉우리 네 개 솟은 게 사룡산이다. 풍수지리학에서는 봉(봉우리)과 용이란 말이 거의 같은 용도로 쓰인다. 경주 서면 아화리 아화새못 지점에서 본 것이다.
날개같이 펼쳐진 오봉산-사룡산. 사진 왼편 봉우리 다섯 개 있는 산이 오봉산, 오른쪽 끝 봉우리 네 개 솟은 게 사룡산이다. 풍수지리학에서는 봉(봉우리)과 용이란 말이 거의 같은 용도로 쓰인다. 경주 서면 아화리 아화새못 지점에서 본 것이다.
도계서원. 우리 시가문학의 거두인 노계 박인로를 모시는 곳이다. 그 앞에 시비가 보인다.
도계서원. 우리 시가문학의 거두인 노계 박인로를 모시는 곳이다. 그 앞에 시비가 보인다.

우리가 먼저 따라 걸을 산줄기는 낙동정맥이다. 강원도 태백 지점에서 백두대간으로부터 갈라져 나와 평면거리 350여㎞ 입체(등락)거리 400여㎞를 달리는 산줄기다. 부산 다대포 해수욕장 동편 울타리 능선 끝 '몰운대'(沒雲臺)라는 명승지가 종점이다.

분기점은 태백시 중심부 정북에 자리한 매봉산 1,145m봉. 소백산-태백산은 물론이고 함백산-은대봉-금대봉까지 다 지나 북상한 다음에 자리했다. 발전용 풍차들이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그 산 정상 천의봉(1,303m)을 지나 조금 내려선 곳, 고랭지 배추밭으로 개간돼 봉우린지 뭔지 느낌이 안 가는 곳이기도 하다.

이 봉우리에 빗물이 떨어져 서쪽으로 흐르면 한강, 동북으로 구르면 삼척 오십천, 동남으로 내리면 낙동강 물이 된다. 거기가 세 물길의 갈림점이란 말이고, 그래서 붙은 이름이 '삼수령'(三水嶺)이다. 명실상부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인 것이다.

현장에서는 더 아래 '피재'라는 태백 시내 구간 고개에 삼수령 표적비가 세워져 있다. 또 낙동강 발원지로는 '황지'(潢池), 한강 발원지로는 그 너머의 '검룡소'(劍龍沼)가 지목된다. 그러나 그 모두는 어디까지나 상징물들일 뿐이다.

낙동정맥은 1,145m봉에서 갈라져서 '분수령목장'을 통과하며 내려선다. 그리고는 소위 '작은피재'를 경계로 해서 백두대간과 결별한 뒤 '구봉산'으로 솟아나 본격 낙동 능선으로 출발한다.

취재기자가 끼였던 '대구마루금산악회' 종주팀은 이 정맥을 22개 구간으로 나눠 걸었다. 보통 한 번에 7, 8시간씩 도합 22일에 걸쳐 답사한 것이다. 그 중 강원도 영역이 약 1.7구간, 경남-부산 영역이 5.1구간 정도고, 나머지 15.2구간이 경북이었다. 낙동정맥의 70%가 경북 땅에 있다는 얘기다.

이 시리즈가 살필 경북 최남단 부분은 그 중 3개 구간이다. 시점(始點)은 종주꾼들이 흔히 '아화고개'라 부르는, 영천-경주 사이 구 국도에 있는 재다. 정맥 흐름으로 보자면 영천 만불산을 거쳐 내려선 지점. 낙동은 이 고개를 지난 뒤 사룡산으로 다시 솟고 단석산을 거친 뒤 1,000m대 높이를 회복한다. 이름 하여 '영남알프스' 구간. 그 첫 산이 고헌산이며 피크가 가지산이다.

'아화고개'는 매봉산에서 출발한 낙동정맥이 거기까지 오는 동안 가장 낮게 떨어진 곳이다. 높이래야 겨우 해발 100여m. 그런데도 이 고개는 당당히 물길을 갈라 붙인다. 그 서편은 금호강으로 가는 '북안천', 동편은 흔히 '서천내'라 불리는 경주시내 구간 형산강으로 합류해 가는 '대천'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도 응당 그 고개로써 경주-영천을 가르는 분계점으로 삼았다. 중요한 건 높이가 아니라 의미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개 이름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 서편에는 영천 북안면 고지리(庫旨里), 동편에는 경주 서면 아화리가 있지만 어느 쪽도 '아화고개'라는 이름에 고개를 쉬 끄덕이지 않았다. 산꾼들의 명칭에 문제 소지가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대신 고지리 할아버지는 그걸 '시모골재'라고 일렀고, 아화리 쪽에선 '지경고개'로 부른다 했다. 시모골은 아화에 있는 골짜기, '지경'(地境)은 경계선에 있는 고지리 마을 이름이었다. 영천과 경주에서 각자 재 넘어 도달할 상대편 지명을 고개이름에 끌어다 쓴 셈이다. 이번 취재서는 곳곳에서 비슷한 현상이 발견됐다. 그런 중에 고지리 할아버지는 그걸 '도둑골재'라고도 부른다 했다. 큰 아화시장에 가 소를 팔고 넘어오다가 그런 일을 겪곤 했다는 얘기였다.

하루빨리 고개 이름이 정리됐으면 좋겠다. 행정구역 경계선에는 흔히 '지경마을'이라는 게 있고 '지경고개'라는 것도 있으니, 이곳도 아예 '지경재' 정도로 하면 어떨까 싶다. 경주-영천 양쪽이 합의해 큰 안내판 하나 세우면 더할 나위 없을 테다.

그 고개에서 낙동정맥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걸으면 사룡산(四龍山)으로 올라선다. 대구권 지형을 형성하는 비슬기맥이 갈라져 나가는 매우 의미 있는 곳. 용 네 마리와 관련된 전설이 있기도 하고, 산봉우리가 넷이어서 사룡산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용은 풍수지리학에서 산줄기를 이르니 그거나 이거나 비슷한 말이다.

사룡산 네 봉우리 모습은 '지경재' 일대에서 잘 확인된다. 하지만 그쯤에서 바라다보이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으로는 오봉산, 서로는 구룡산이 좌우 날개같이 나란히 펼쳐진다. 낙동정맥에선 사룡산을 지난 뒤 오봉산이 갈라져 나가고, 비슬기맥에선 사룡산을 지난 뒤 구룡산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대구서 경주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보자면, 경주터널 직전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봉우리 4개 솟은 산이 사룡산(최고봉 686m)이다. 만약 서행하면 그쯤서는 그 왼편으로 이어져 있는 봉우리 다섯 개의 오봉산(최고봉 633m)도 살필 수 있다. 주의 깊은 여행자라면 거기 도달하기에 앞서 사룡산 오른편으로 다소 멀리 벌려 선 구룡산(최고봉 675m)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사룡산은 워낙 중요한 산이라 다음 회(回)에 한 번 더 다루고 나중 비슬기맥 차례서도 또 한 번 살필 예정이다. 그렇지만 노정(路程)상 지금 아니고는 살펴 둘 기회 얻기가 어려운 일도 있는 법. 우리 고전 시가문학 거두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고향이 바로 이 즈음이라는 것도 그런 이야기 중 하나다.

노계(1561∼1642)는 우리가 잘 아는 시조 '조홍시가'(早紅枾歌)의 시인이다. 아까 본 지경재서 출발해 사룡산으로 오르는 낙동정맥 기슭 마을인 영천 북안면 도천리서 태어났다고 했다.

32세 때 임진왜란이 터지자 수군으로 종군하기도 했으나, 40세 이후에는 고향에 은거하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태평사·누항사 등 가사 9편과 시조 67편을 지어 우리 문학사에 우뚝 섰다.

아까처럼 고속도로를 달린다면 경주터널 직전에 오른쪽으로 보이는 '대봉지공'(大峯紙工)이라는 공장 지나 들어가는 작은 골 안에 그를 기리는 '도계(道溪)서원'이 있다. 1984년 3월에 세웠다는 서원 앞 '노계시비'(蘆溪詩碑)에 새겨진 것도 조홍시가였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 유자 아니라도 품음 즉도 하다마는 / 품어 가 반길 이 없을 새 / 글로 설워 하노라'. 노계는 분명 사룡산이 낳은 대시인일 터이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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