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성미의 책속 심리] 잘 가요 언덕

차인표/도서출판 살림

차인표의 소설 '잘 가요 언덕'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처럼 정겹고, 동화처럼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다루고 있다. 작년 10월, 대구시교육청에서는 학생 독자들을 위해 '차인표 작가와의 만남'을 마련하였다. 행사의 사회자로 오른 나는 차인표씨 옆에 앉게 되어 들떴지만, 그는 정신과 의사가 옆에 있다는 게 달갑지 않은지 굳은 얼굴이었다.

차인표씨는 1997년 TV 방송에서 일본군 위안부 '쑨 할머니'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이 나라와 할아버지들에 대한 분노가 소설을 쓰게 된 원동력이라고 했다. 미국 명문대를 졸업하고, 한국에서 톱스타로 남부러울 것 없는 그가 어떻게 할머니들의 상처를 깊이 포착할 수 있었을까. 뛰어난 공감지능의 소유자이기 때문일까. 이 소설을 쓰게 된 심리적 의도는 무엇일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엄마가 없는 아이들이다. 순이 엄마는 병으로 돌아가셨고, 용이 엄마는 백호(호랑이)에게 물려갔다. 샘물이, 훌쩍이도 엄마와 헤어졌고, 새끼 호랑이도 포수에게 어미를 잃었다. 엄마를 잃은 아이(새끼)들끼리 상처를 보듬으며 대견하게 살아간다.

순이가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엄마별 때문이다. 돌아가신 엄마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이 있다. 아이들은 엄마와 떨어지게 되면, 엄마의 냄새가 배어있는 담요나 베개, 인형을 엄마 사랑의 대리물로 여긴다. 정신분석가 도날드 위니코트는 이런 물건을 임시대상(transitional object)이라고 하였다. 순이의 엄마별처럼,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을 간직하는 사람도 있고, 아기 때 쓰던 담요를 안고 자는 이도 있다.

순이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어했다. '한 아이가 아닌 여러 아이들의 엄마. 아이들이 울 때 업어주고, 아플 때 만져주고, 슬플 때 안아주고, 배고플 때 먹여주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평생 살다가 아이들과 헤어질 때쯤 되면 아이들의 엄마라는 이름을 갖게 되겠죠.' 작가는 엄마와의 깊은 애착관계와 사랑이 복수를 용서로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행사가 마칠 때쯤, 차인표씨는 자기 이야기를 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어머니와 우리 삼형제를 버리셨어요.' 어머니는 한국에서 자식을 키우기가 힘들어 미국으로 건너갔고,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안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복수를 위해 백호를 찾아다니는 용이처럼, 그도 아버지가 죽도록 미웠다고 했다. 행사장이 숙연해졌다.

그의 소설은 자신의 심리적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 세상 모든 어머니와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그가 왜 가장 상처 투성이인 버림받은 위안부라는 소재를 선택했는지, 복수는 어떻게 용서가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행사장을 떠나는 차인표씨의 뒷모습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소설 제목 '잘 가요 언덕'에서 보듯 차인표는 지난날의 상처를 향해 '잘 가요'라고 인사를 할 만큼 성장했다. 엄마의 체취가 묻은 인형을 내려놓을 때, 분노로 치뜬 눈을 다소곳이 내리뜰 때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잘 가요 언덕, 잘 가요 차인표씨.'

김성미(마음과마음 정신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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