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한 대학병원에 가 보면 응급실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고 한다. '환자의 경중(輕重)은 의사가 판단함.' 응급실에 온 환자의 병이 가벼운지 또는 심각한지, 그래서 그 환자가 급한지 덜 급한지의 우선순위는 의사가 정한다는 뜻이다. 언뜻 보면 전문가가 판단하는 것이 당연한데 무엇 때문에 굳이 명시해 놓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응급실에 근무해 본 사람이라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무릎을 치고 감탄할 구절이다. 일단 환자 입장에서는 급하니까 응급실에 왔다. 손톱 밑에 가시가 박혀도 엄청나게 아플 판인데 하물며 얼굴이 찢어지고 뼈라도 부러졌다면 자신이나 일행은 말할 나위 없이 급하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창자가 터지고, 머릿속의 혈관이 터지고, 심장으로 가는 혈관이 막혔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다.
응급실에 근무하는 의료진들의 입장에서 보면 1년 365일, 하루 24시간을 급하다며 달려온, 이른바 '응급환자'만 본다. 도시에만 살다가 몇년 만에 바다에 간 사람은 바닷바람을 쐬고 수평선을 보면서 가슴이 벅찰 수도 있다. 그렇지만 늘 바닷가에 살고 있는 사람도 그렇게 같이 느낄까? 시원한 바닷바람과 아득한 수평선은 항상 곁에 있어서 그저 일상적인 생활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응급실 의료진에게 있어서 응급은 일상이다. 그리고 반드시 일상이어야만 한다.
의료진이 같이 당황하고, 의학 드라마에서처럼 함께 슬퍼하며 눈물짓고, 가족인 양 흥분하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자. 인간적으로 보이기야 하겠지만 이미 평상심을 잃고 판단이 흐려진 의료진은 또 다른 '보호자'일 뿐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의료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냉정한 가슴과 침착한 머리다. 환자들끼리의 우선순위를 먼저 정하고, 이어서 각각의 환자들에게 있어서도 진단과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갈등과 반목이 시작된다. 환자는 당연히 자기를 먼저 봐 주고, 자주 봐 주고, 특별하고 친절히 대해 주기를 원한다. 의료진은 급한 환자에게 먼저 눈길이 가고, 불안한 환자를 더 자주 확인하게 되고, 육체노동 못지않은 감정노동까지 겹치고 지쳐서 무표정이 된다. 그래서 응급실 안에는 환자든 의료진이든 신경이 예민하지 않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순간 어디서든 곱지 않은 말 한마디라도 나오면 바로 소란스런 언쟁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다 의료진의 불성실까지 한몫을 한 경우에는 아예 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이럴 때 가장 큰 피해자는 물론 다른 환자들이다. 따지고 보면 선량한 다수의 피해자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사회에서 응급실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배려'(配慮)와 '인내'(忍耐)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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