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 사이에 영문 이니셜 약칭이 유행한 적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YS(김영삼) DJ(김대중) JP(김종필)다. 국내에서 영문 약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5'16쿠데타 직후부터다. '두려운 존재'가 된 5'16 주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어 박정희 전 대통령을 PP(President Park), 김종필 전 총리를 JP라고 부른 것이 시초라고 한다.
5'16 이전에는 우남(雩南) 이승만, 백범(白凡) 김구, 해공(海公) 신익희, 해위(海葦) 윤보선, 운석(雲石) 장면처럼 아호(雅號)가 널리 쓰였다. 그러나 소장파였던 5'16 주체들에게 아호를 붙이려니 낯이 간지러웠고, 그렇다고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도 없어 영문 약칭이 등장한 것이다.
정치인의 영문 약칭은 유권자들에게 국제적인 인물로 부각시켜준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인지 YS'DJ'JP의 측근들은 아호인 거산(巨山), 후광(後廣), 운정(雲庭)보다 영문 약칭을 더 선호했다. 영문 약칭이 유행하면서 경쟁 관계인 정치인은 이니셜로 부르면서 자기는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나 영문 약칭은 사회적, 언어적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야 얻을 수 있다. 자유선진당의 이회창 총재는 영문 이니셜 HC로 불리길 원했다. '창(昌) 또는 창(槍)' '대쪽' 등으로 희화화되는 게 못마땅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해당 집단 내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이라는 사회적 조건은 충족시켰으나 언어적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이다. 'H'가 발음상 3음절인데다 'H씨'로 불려 당초 의도와 달리 부정적 이미지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오는 7월부터 고용노동부로 부처 이름이 바뀌는 노동부가 약칭에서 노동을 빼고 '고용부'로 부르기로 해 논란이 일고 있다. 노동계가 노동의 가치나 노동자를 홀대하는 현 정부의 가치관을 드러낸 것이라며 차라리 '고된 노동'을 뜻하는 '고노(苦勞)부'로 부르겠다며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약칭은 시장에서부터 생겨남을 기억하라. 즉 사람들이 약칭으로 부르고자 할 때만 약칭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풀 네임으로 부르면 그것이 이름이고 로고가 된다.' 마케팅의 거장 잭 트라우트의 말을 노동부는 한 번쯤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조영창 논설위원 cyc58@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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