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등장한 사람' '이미 사용했거나 오래됨'.
신인(新人)과 중고(中古)의 사전적 의미다. 상충되는 의미의 두 단어가 요즘 우리 사회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이른바 '중고 신인 '들의 등장이다. 느즈막히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 중고 신인들은 '신인 같지 않은 신인'으로 통한다. 풋풋함과 함께 노련미도 갖추고 있어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고 신인들을 만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인생 2막…"나는 행복합니다"
김상원(37·대구 남구 대명동) 씨는 대구 중구청 교통과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나이로 보면 서열이 중간쯤 될 것 같지만 부서에서 제일 막내다. 지난해 대구시 9급 행정직 시험에 최고령으로 합격, 늦깎이 공무원이 됐기 때문이다.
김 씨의 이력을 보면 '9급 공무원이 성에 찰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는 영남대 정외과를 졸업한 뒤 대학원에 진학, 석사 학위까지 받은 엘리트다. 대학원 졸업 후에는 현대해상에서 5년간 근무했다. 영어 실력도 수준급이다. 호주로 어학 연수를 다녀온 덕분에 토익 점수가 900을 넘는다.
왜 그가 대우 좋은 대기업 근무를 마다하고 공무원으로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됐는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아버님이 공무원이어서 어릴 때부터 공무원을 동경했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얼마 안 있어 결혼을 하는 바람에 쫓기듯 취직을 했지만 저하고는 맞지 않았습니다."
김 씨는 2008년 공무원 시험 공부를 시작해 이듬해 133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했다. "시험 준비 기간이 짧아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은 딸 엄두도 못냈습니다. 나이도 많고 백수 생활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시험 치기 전까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합격자 발표 당일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조했습니다."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김 씨는 지금도 당시의 감격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특히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에게 큰 선물을 했다는 기쁨이 무엇보다 컸다. 지난 3월 정식 발령을 받아 이제 공무원 생활 6개월째를 맞이한 그는 합격 통보를 받은 이후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것 자체가 즐거울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남들보다 한 발 늦게 시작한 까닭에 직장생활을 하는 데 애환은 없을까. 혹 나이 적은 사람을 상사로 모시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을까. "주변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습니다. 특히 나이가 문제된 경우는 없습니다. 나이 많은 것은 제 잘못이지 조직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는 오히려 늦은 출발이 장점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한 차례 경험한 사회생활이 일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주고 원만한 대인관계 형성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 "지금 하는 일이 자동차 의무보험에 가입하지 않는 차주에게 보험 가입을 독촉하는 것입니다. 일의 성격상 민원인들과 부딪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과거 직장생활을 했던 경험이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김 씨는 조만간 여름 휴가를 다녀올 계획이다. 몇 년 만에 마음 편히 맞아보는 휴가인지 모른다고 했다. "딸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됐습니다. 직업이 없을 때는 집안 대소사에도 소극적이었습니다. 이제는 가장과 자식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싶습니다. 더불어 어렵게 새 출발을 한 만큼 남들보다 더 열심히 직장생활도 할 생각입니다."
◆"올 프로야구 신인왕은 내 꺼."
올 프로야구 신인왕 경쟁에서 다크호스로 떠오른 삼성라이온즈 외야수 오정복(24) 선수도 중고 신인이다. 인하대를 졸업하고 지난해 삼성라이온즈에 입단했지만 주로 2군에서 뛰었다. 올 프로야구에서 오 선수는 말 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올 시즌 1군 무대 데뷔 게임이었던 5월 2일 한화와의 대전경기에서 동점과 역전 홈런을 잇따라 쏘아 올리며 신데렐라로 부상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1위를 차지할 만큼 그의 등장은 화제를 모았다.
프로야구 선수로는 작은 체구(176㎝, 72㎏)에도 불구하고 파워풀한 배팅으로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치는 그가 팬들 입장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지만 사실은 2군에서의 담금질이 만들어낸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 선수는 "2군 훈련량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입에 단내가 날 정도의 강도 높은 훈련과 게임을 소화하다 보면 정신무장도 되고 볼 배합을 읽을 수 있는 능력도 길러집니다. 고교나 대학을 막 졸업한 신인이 1군 경기에 바로 서면 긴장이 돼 제 실력을 발휘하기 힘듭니다. 2군을 거친 선수들이 1군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많이 펼치는 이유입니다"고 말했다.
또 그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2군 경험을 가진 선수가 2군 경험이 전혀 없는 선수보다 롱런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야구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의지도 강하기 때문입니다"고 강조했다.
최근 오 선수는 페이스가 주춤하면서 신인왕 경쟁에서 뒤처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3할을 넘었던 타율이 2할8푼대로 떨어졌습니다. 더워지면서 집중력이 떨어져 나쁜 공에 손을 많이 댄 것이 원인입니다. 야구는 9회 말 투아웃부터라는 말처럼, 신인왕 경쟁도 끝나봐야 결과를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평생 한 번뿐인 신인왕 타이틀을 거머쥐고 싶습니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 오 선수에게 롤 모델로 삼고 있는 선수가 누구인지 물었다. 대답은 약간 뜻밖이었다. 기라성 같은 삼성라이온즈 출신도 아니고 같은 외야수도 아닌 SK 2루수 정근우 선수를 꼽았기 때문이다. "정근우 선수 야구하는 것을 보면 야무지게 합니다. 승부 근성도 뛰어납니다. 야구 똑 부러지게 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오 선수의 휴대전화 컬러링은 알 켈리의 'I Believe I Can Fly'다. 야구를 향한 신념대로 그가 비상하는 날을 기대해 본다.
◆"딸과 같은 학과 동기예요"
정경희(45·대구 북구 칠성동) 씨와 김혜정(20) 씨는 영진전문대 사회복지학과 10학번 동기다. 나이 차를 제외하고 특별할 것 없어 보이지만 두 사람은 사실 모녀지간이다. 정 씨가 대입검정고시를 거쳐 만학도 전형으로 캠퍼스를 밟으면서 딸과 학과 동기가 됐다. 같은 학과에 다니고 있지만 캠퍼스에서 부딪칠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반이 달라 수업 시간이 다르기 때문.
정 씨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사회복지학과를 진학한 데는 이유가 있다. "평범한 가정 주부로 살았습니다. 아들, 딸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삶이 당연한 듯 살았습니다. 그러다 집안 어르신들이 많이 편찮으셔서 간호를 하면서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 씨는 대학 진학을 위해 지난해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했다. 속된 표현으로 독하게 공부했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공부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공부를 해본 지 너무 오래돼 머리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공부하면서 여러 번 구토를 했을 정도입니다. 두 달 정도 고생을 하고 나니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린 덕분에 그녀는 5개월 만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자식 같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어울리면서 보낸 지난 학기는 정 씨에게 어떤 감회로 다가왔을까. 그녀는 어려운 점보다 즐거운 기억이 많았다고 했다. "순발력과 이해력이 떨어져 학업을 따라가는 것이 조금 벅찼습니다. 특히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아 과제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공부하는 것 외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 학기를 돌아보면 많은 것을 배웠고 좋은 선생님도 많이 만났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생활하니까 몸과 마음이 젊어진 것 같습니다."
첫 방학을 맞았지만 정 씨는 여전히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졸업 후에는 편입을 해 공부를 더 할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일을 하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이경달기자 sarang@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
'어대명' 굳힐까, 발목 잡힐까…5월 1일 이재명 '운명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