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담양 추월산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곳,나를 향한 물음이 시작되다

추월산을 한컷으로 묘사한다면 '벼랑 끝에 걸려 있는 보리암'쯤 될까. 물론 가을을 수장(水葬)이라도 할 듯 산을 감고 돌아가는 담양호의 코발트색 물빛을 수위(首位)에 놓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색조가 자취를 감추고 색(色)이 공(空)으로 돌아가는 지금 같은 때엔 산속 암자의 '위태로운 배치'에 더 큰 끌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 벼랑 끝에 걸려 있는 보리암

관악산 연주대, 구례 사성암의 공통점은 사찰의 긴장스런 위치다. 수십 길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놓은 듯 자리한 사찰들은 배치 자체가 하나의 화두다. 내세(來世)나 구도에 근원을 두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위안은 종교의 가장 큰 덕목 중의 하나. 이런 위험한 공간 구도는 신자들의 평안과 반(反)한다. 주변 강천사나 장성 백암사가 연꽃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듯 자리 잡은 것과는 확연히 비교된다. 아마도 더 물러설 곳이 없는 극단의 점이 수도의 출발점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절벽 한가운데 자리한 티베트 은자들의 동굴이나 빗장을 지르고 안거(安居)에 든 수도승처럼 구도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추월산은 가을에 올라야 제 멋을 알 수 있는 산이다. 가을밤에 올려다보면 바위 봉우리가 달에 닿을 듯 높아 보인다고 해서 '추월'(秋月)이다. 호남 5대 명산 중 하나이며 울창한 수림과 기암괴석이 성벽처럼 둘러쳐져 있어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는 남원성과 함께 호남 의병의 본거지였고, 동학농민전쟁 당시 배신자의 밀고로 위기에 몰린 전봉준이 끝까지 항거한 곳이다. 6'25 때는 노령산맥을 기반으로 한 빨치산들의 거점이기도 했다.

계절을 비껴서 겨울에 찾아온 담양, 제일 먼저 메타세쿼이아숲 길이 일행을 맞는다. 학동 교차로와 순창을 잇는 8.5㎞, 5천여 그루의 퍼레이드는 2006년 '한국의 아름다운 길' 최우수상을 받은 명품 코스다. 노란 침엽(針葉)을 카펫처럼 길가에 뿌려 놓고 가로 양쪽에서 쓸쓸히 도열해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에서 시간의 흔적을 본다.

읍내를 빠져나온 버스는 다시 담양호변을 달린다. 가을을 삼킨 호수는 여전히 푸르고 청량하다. 아침 안개가 살짝 걷힌 호반 기슭엔 지난 계절에 떨어진 낙엽들이 오색 띠를 이루고 있다. 저 띠들이 침잠할 때쯤 계절은 겨울의 한복판에 놓이게 될 것이다.

◆정상에 서면 호남 명산들 한눈에

추월산 등산로는 담양호를 끼고 있는 월계국민관광단지에서 출발한다. 보리암까지 이르는 한 시간 길. 울창한 활엽수림은 완전히 옷을 벗고 찬바람에 잔가지를 내맡겼다. 등산로엔 가을 내내 산을 덮었던 낙엽들이 카펫을 이루었다. 발끝에서 부스러지는 잎새에서 푸근한 쿠션감이 느껴진다.

철계단에 다리가 뻐근해지면 암자에 다 이르렀다는 표시다. 암자 직전 절벽에 걸린 한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쫓기던 김덕령 장군의 부인 흥양 이씨가 치욕을 피하기 위해 투신한 순절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나라와 가문의 명예를 위해 몸을 날린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부인을 잃은 충장공도 29세의 나이에 모함을 받아 부인 뒤를 따랐다.

바로 앞에 있는 보리암은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세운 암자로 백양사의 말사다. 보조국사는 지리산에서 매 세 마리를 날리고 새들이 자리를 잡았던 보리암, 장성 백양사, 순천 송광사에 절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새가 겨우 깃들일 만한 자리에 불사를 열었으니 애초부터 대중포교 사찰보다는 수도도량으로 쓰임새를 정한 듯하다.

절 입구에서 약수를 한 모금 마시고 절 마당에 들어선다. 낮은 울타리를 넘어 담양호가 손에 잡힐 듯 들어온다. 호수의 청량한 냉기는 어느새 훌쩍 솟아올라 나그네의 얼굴을 씻어 준다. 가을 내내 단풍의 배색(配色)을 맞추던 호수도 이제야 옥빛 물색을 마음껏 뽐낸다.

다시 정상을 향해 오른다. 급경사의 철계단과 바위 길이 다시 이어진다. 호수를 한눈에 내려다보는 전망대를 올라서면 바로 추월산 정상이다. 호남정맥의 중간기지답게 시원한 조망을 펼쳐 놓았다.

서북쪽으로 내장산, 입암산, 방장산이 보이고 동쪽에서 담양호 십자수로(十字水路)를 넘어 막 겨울옷으로 갈아입은 강천산이 아는 체를 한다. 담양 들판을 가로질러 멀리 무등산도 흐릿하게 조망을 보탠다.

◆ 대쪽 같은 기개, 국난 때마다 국방 보루

호남의 명산들을 사열(査閱)하고 나니 허기가 밀려든다. 정상 안부에서 민생을 해결하고 수리봉으로 나아간다. 능선을 따라 찬바람을 가르면 1시간 못 미쳐 수리봉에 이른다. 봉우리 뒤쪽엔 531봉을 배경으로 아찔한 절벽이 걸려있다. 인파로 번잡스런 정상을 피해 등산객들은 여기서 인증 샷을 찍기도 한다.

수리봉에서 무능기재를 넘어 북쪽으로 진행하면 깃대봉을 거쳐 천치재로 연결된다. 시간에 쫓기는 외지 등산객들은 여기서 오른쪽으로 하산해 복리암을 거쳐 주차장으로 내려선다. 약 9.5㎞의 원점 회귀코스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어느덧 5시간에 걸친 산행을 마치고 귀갓길에 나선다. 아침나절 안개 속에서 일행을 맞던 담양호의 옥빛 물결은 어느덧 붉은 노을로 바뀌었다.

마을 뒷산엔 대나무 숲이 바람에 한가롭게 일렁인다. 대나무는 담양을 특징짓는 마스코트. 실학자 서유구는 "담양 사람들은 대나무를 종이처럼 다듬어 물건을 만들었다"고 '임원경제지'에 적고 있다. 이런 곧고 반듯한 기상은 지역민의 성정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담양은 죽향(竹鄕)답게 문인 화풍의 은은한 묵향과 대쪽 같은 무인의 기개와 저항이 동시에 느껴진다. 가사문학의 태두 송강 정철 같은 문사(文士)들이 많이 배출되었고, 국난 때마다 민관이 떨쳐 일어나 국방의 보루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제 절벽 끝 보리암도 어둠에 잠겼다. 지금쯤 낮에 불청객들의 소란에 화두를 흩트린 스님이 선문답 하나 잡고 토굴에 들 시간이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가는길=88고속도로를 타고 담양 IC를 빠져나와 담양읍 향교 건너 29번 국도를 탄다. 용면 삼거리를 지나 추월산과 금성면 가는 갈림길에서 좌회전, 추월산 가는 길로 접어들면 된다.

◆볼거리=대나무박물관, 죽녹원, 관방제림, 광주호, 가사문학관, 식영정, 소쇄원 등 다양한 역사, 문화코스가 있다.

◆먹을거리(지역번호 061)=떡갈비(덕인관'381-2194, 신식당'382-9901) 돼지갈비(승일식당'383-5482) 한정식(민속식당'381-2515) 대통밥(한상근 대나무통밥'382-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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