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대학교수가 강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만 알았다. 더 커서는 교수가 가끔 출장도 가는 사람이라고 알았다. 그런데 많이 공부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교수들의 출장은 세미나라는 외국말로 부르는 것 같았다. 뭔지 잘 몰라도 세미나란 낱말은 지적인 사람들이 자유롭고 진지하게 벌이는 일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내겐 그 어감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크게 바뀌지 않았으니까 조금은 바뀌었단 말이다. 내가 차츰 알게 된 사실은 세미나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무작정 자유롭진 못하고, 마냥 진지하진 않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내 생활은 영화관에 가는 횟수보다 학술행사에 가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세미나, 특강, 포럼, 심포지엄과 같은 갖가지 학술적인 모임은 영화보다 재미없지만(그리피스가 감독한 영화 '국가의 탄생'보다는 재미있지만), 일단 플래카드에 붙은 제목은 사람들의 흥미를 당긴다. 그럴싸한 제목과 주제에 끌려간 그곳,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건 있다'. 행사장 입구에는 발표문과 더불어 음료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그 간식들은 왜 항상 비닐봉지에 낱개 포장된 것들일까. 조용한 장내에서 그걸 뜯어먹으려면 츠쓰슥싸아아, 그 어떤 소음보다 귀에 거슬린다. 그 소리는 '난 먹을 것만 밝히는 미련퉁이'라는 자책감 섞인 내면의 목소리로 대치된다.
그래도 먹을 땐 좋았다. 인사와 다과로 약간 들뜬 흥은 발표가 진행되면서 급하게 가라앉는다. 발표자는 자기 글에 취한 나머지 정해 놓은 시간을 훌쩍 넘긴다. 사회자가 '마무리 지으세요'식으로 쓴 쪽지를 건넨 다음에야 낭독은 마무리된다. 방청석에 앉은 사람들의 눈은 발표자들의 입보다 빠르다. 능숙한 발표자가 조리 있게 요점만 정리하기에 앞서, 객석에 앉은 학자들은 글을 단번에 파악한다. 이들은 이후에 생기는 무료함을 없애기 위해 오타를 찾기도 하고, 뒤편에 쓰인 참고문헌을 살피며 자신이 읽은 게 몇 개나 되는지도 본다.
학자들보다 지적 훈련을 덜 받았으며, 학회에 대한 결속력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바깥에 재미있는 일이 학자들보다 더 많은 대학생들은 흐르지 않는 시간과 싸운다. 학생들은 무료함을 스마트폰과 낙서로 달래다가 기회를 봐서 하나 둘씩 사라진다. 마지막에 종합 토론과 방청석 질문이 이어지는데, 발표자에게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장황하게 과시하는 청중도 꼭 있다. 보석 같은 시간은 그때 찾아온다. 돌발적인 상황을 재치 있는 언술로 받아넘기는 순간은 의례적인 발표문에서도 찾을 수 없는 유쾌하고도 쓸모 있는 지식으로 내 머리에 남아있다. 오직 활자로 된 것만이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거기에 생생한 토론이 뒤따라야 한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문화평론가 윤규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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