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이 되었는데도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이 차다. 일기예보는 뭉뚱그려'이상기온'으로 치부하지만 시인들은'꽃샘바람'이니'하늬바람'으로 이름을 붙여 부른다.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명가들이다.
공원 야산에는 봄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꽃샘바람이 불든 하늬바람이 불든 꽃은 피게 되어 있다. 어느 시인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누군가에게'꽃'이라 불리고 말았으므로. 꽃은 피어야 비로소 꽃인 것이다.
이른 아침. 도심지 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두들 겨우내 걸쳤던 두꺼운 옷을 벗어던졌다. 성급한 젊은이들은 아예 조깅복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운동 삼아 걷기 좋은 계절이 된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열심히 걷는다. 공원에서는 누구나 금세 친해지기 마련이다. 나이도 성별도 계급도 없다. 만나는 사람마다 웃음 띤 얼굴로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날씨 좋군요. 혼자 오셨나 봐요.
나에게 걷기는 생각의 연장이다. 생각이 막힐 때나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 나는 곧잘 운동화를 신는다. 몸을 움직여야 생각이 정리되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다. 걷는 동안 막혔던 논리가 트이고 실타래처럼 엉켰던 상념들이 풀렸던 경험이 적지 않다. 생각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몸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 준 덕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라토너이고 김훈이 자전거 레이서라는 사실은 나로서는 은근히 기분 좋은 일이다. 그들에 비한다면 나야 겨우 보행자일 뿐이지만'생각'을 위해'몸'을 즐겨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학계에서 주장하는'히포캄포스(Hippocampus)론'도 마음에 든다. 인간의 뇌 속에 있는 히포캄포스는 와이셔츠 단추만한 크기지만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수행한다고 한다. 또한 이 신경세포는 일정한 박자와 리듬으로 움직이는 특징이 있어서 걸을 때 활동이 가장 잘 촉진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인간으로 된 것이 두 발로 걷기 시작한 시점부터라면 걷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해가 떠오르자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한다. 근처 밭에서 채소를 뜯어 파는 할머니에게 눈을 주고 있는데 휴대폰 벨이 울린다. 친정아버지다. 아침부터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꼴로 봐서 글은 길에서 쓰는 모양이라고 핀잔이 대단하다.
"그럼요, 길에서 쓰지요."큰소리로 대답한다. 말하고 보니 길에서 쓰는 글이 얼마나 건강한가 싶은 생각이 든다. 몸과 땀이 묻어나야 살아있는 글이 아닐까. 나는 한껏 가슴을 펴고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小珍/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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