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대구이야기

1592년 임진년 동래성이 왜군에게 하루 만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한양 도성에 전해지자 선조 임금과 대신들은 어전 회의를 열고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하지만 건국 후 200년 동안 평화에 취해 있던 조선 조정에서 뾰족한 대책이 나올 리가 만무했다. 그나마 세종시절 북방영토 개척을 하였던 김종서를 생각해 내고 아득한 옛날 김종서 장군이 남긴 뭔가가 없을까 하고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고문서들을 뒤져서 김종서 장군이 쓴 '조선전수방어전략'을 어전 회의에 가져다 놓았다. '남쪽에서 오는 적에게 대구를 잃으면 왕은 바로 평양으로 몽진하고 군은 서울에서 사생결단을 내야 하고, 북쪽에서 오는 적에게 평양을 잃으면 왕은 대구로 몽진하고 군은 서울에서 사생결단을 해야 한다…'는 기록이 있어 급히 장군 이일에게 대구를 지키라 명하였다. 사나흘 동안 겨우 군졸 200명을 모아서 남쪽으로 떠나게 하였다.

대구에서는 신천변에 5만여 농민군이 모였다. 하지만 왜군이 경산 자인쯤 진격해오면서 조총을 쏘아대자 총소리에 놀란 농민군은 모두 흩어졌다. 대구로 향하던 이일 장군도 상주 즈음에서 왜군 구경도 해보지 못하고 겁에 질려 도망쳐 버렸다.

400여 년이 흐른 뒤 1905년 러일전쟁과 함께 한반도에 다시 주둔한 일제의 군대는 서울 용산에 사령부, 평양에 사단본부, 대구에 여단본부를 두었다. 1945년 해방 뒤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도 용산에 사령부, 대구에 군사기지를 두고 있다.

6'25를 맞아 우리 군과 유엔군도 국가존망의 명운을 걸고 싸울 때 대구에 육군본부, 미8군사령부를 두고 대구를 지킴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대구에는 2군사령부, 명칭이 바뀌어서 제2작전사령부를 두고 있고, 여전히 미군부대가 시내 중심에 주둔하고 있다.

이처럼 대구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앞으로도 한반도가 존재하는 한 대구는 국가 방어의 핵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구는 평화기보다 전쟁이 나야 빛을 발하던 도시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한 뒤 대구의 군사적 가치를 알게 된 신라 조정은 수도를 경주에서 대구로 옮길 계획을 세웠지만 이후 긴 평화기를 맞으며 대구는 이름도 없는 시골 고을로 전락했다. 900여 년이 흐른 뒤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야 국방의 중요성을 깨달아 대구에 경상감영을 설치하면서 오늘의 대구가 있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과 6'25전쟁 기간 대구는 지정학적으로 서울 다음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나, 1953년 6'25가 끝난 뒤 60여 년간의 평화기를 맞으면서 대구의 존재감이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대구의 발전을 위해 전쟁이라도 터져야 한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해야 대구가 침체된 도시에서 활력 있고 멋진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까?

조미옥 리서치코리아 대표 mee50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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