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족으로 흥선대원군 손자인 이준용(李埈鎔'1870∼1917)은 일본을 극도로 싫어했으나 결국 변절, 친일파로서 삶을 마쳤다. 1886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쳤고 집권한 대원군에 의해 국왕이 될 뻔한 행운도 있었으나 반대세력에 의해 좌절됐다. 갑오개혁 때 김홍집(金弘集) 내각에 참여해 한때 등용, 인사권과 군사권까지 장악하기도 했다. 미국인 법률고문 그레이트하우스 등과 접촉하며 반일 친위대 편성을 도모했고, 대원군의 후원을 받아 동학농민군, 청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군 축출과 친일내각 전복을 기도했으나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뒷날 주일 특명전권공사로 내정됐지만 맡지 않고 1895년 5월 군국기무처 김학우(金鶴羽) 의원 암살사건에 연루되고 박영효(朴泳孝) 등 친일파 내각 대신 암살 죄목으로 붙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왕족인지라 왕의 특사로 10년 유배형으로 감형되는 특혜에 이어 그해 8월에 석방됐고, 그해 발생한 일제의 사전 치밀한 계획(일명 '여우사냥')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뒤 오늘 왕명에 의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야 했다.
그는 유학 후 귀국이 허락되지 않자 1897년 유럽지역 시찰에 나섰고 1899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1907년 고종이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하자 귀국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한 뒤 친일의 길을 걸었다. 한 때 극렬한 배일주의자였으나 결국엔 다른 많은 왕족, 귀족들처럼 변절한 삶을 살았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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