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유난히 매혹적인 친구가 있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자신감이 넘치는 활달한 성격에다 언제나 웃는 표정이라 주위사람들로부터 인기도 많다. 그런 그가 한때, 동네에서 바람둥이로 소문이 났었다. 그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 금방이라도 질식할 것 같은 공간이 싫어서 아무에게나 먼저 말을 붙였다고 한다. "1402호에 이사 온 사람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몇 호에 사세요?" 친절이 화근이 되어 그는 동네 여자들에게 졸지에 '작업하는 남자'가 되었다. 나이 지긋한 그는 젊은 부인들에게 살갑게 인사하고, 여자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때로는 나이 든 할머니에게도 부지런히 문안한 것이 청탁을 가리지 않는 플레이보이의 조건을 충족시켰던가 보다. 그야말로 소문은 제멋대로 난무했단다. 그가 난봉꾼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는 2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1402호 아저씨는 나한테도 인사를 잘하는데?" 게는 가재 편이라고 사내아이들의 증언과 할아버지들의 옹호 때문에 겨우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아파트에서 옆집과 인사 나누기가 백 리 길을 가는 것처럼 멀고 어렵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없이 지내기로 결심한 사람들처럼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의도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여자는 성추행범이라도 막아야 할 듯이 쌀쌀맞은 표정을 지어야 하고, 남자는 마치 불륜을 저지르다 들킨 것처럼 뻣뻣하고 어색하다. 무관심보다 더한 형벌은 없다는데, 이처럼 부정적 투사를 주고받으면서 엘리베이터 안은 급속히 냉방이 된다.
온갖 첨단 시스템들이 동원된 아파트는 바람 하나 들어올 틈도 없이 안락한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편리 만점의 주거시설이라고 좋아하면서도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한없이 외롭다.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니 차라리 감옥에서 사람 사귀기가 더 쉽겠다는 말도 생겨났다. 외풍만 막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통도 완벽하게 차단하니 이젠 이웃이 죽어 백골이 되어도 모른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다 보면 중간쯤에 하얀 돔처럼 생긴 성당이 있다. 여행 중에 안으로 들어가 미사를 보다가 횡재(?)를 했다. '평화를 빕니다'며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에 나는 건성건성 눈인사나 할까 했는데, 웬걸 수많은 프랑스 여자들이 활짝 핀 미소로 서슴없이 나를 포옹으로 맞아주었던 것이다. 풍성한 축복이었다. 살다가 내게도 이런 여복도 있나 싶었다.
멀리 있는 사촌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더 낫다는 말은 인정을 주고받기가 쉽기 때문이 아닐까? 길은 애당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다니니 길이 되었다. 인사도 나누다 보면 큰 길이 되겠지.
이규석/대구카네기연구소 원장 293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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