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 거인(巨人)에게 길을 묻다] 제2부 호암 이병철 2)믿음의 리더십

"사람을 뽑을 땐 신중히, 일단 뽑았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호암은 삼성상회 창업 초기부터 임직원들에게
호암은 삼성상회 창업 초기부터 임직원들에게 '믿고 맡기는' 독특한 경영철학을 가졌다. 삼성그룹의 특징인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책임경영을 시키는 경영철학이 대구 삼성상회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진은 호암이 주재한 삼성그룹 사장단회의 모습.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의심이 가거든 사람을 고용하지 마라.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사람을 채용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 그리고 일단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대구에서 삼성상회의 문을 연 호암은 창업 한 달 만에 와세다대 유학시절 친구인 이순근을 지배인으로 영입, 경영 전반을 일임했다. 물론 주위의 만류가 줄을 이었다. 호암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순근을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류하는 사람들에게 '의인물용, 용인물의'를 얘기했다.

◆처음부터 믿었다

호암은 삼성상회 창업 초기부터 직원들에게 '믿고 맡기는' 독특한 경영철학을 가졌고 이 철학을 경영현장에 고스란히 접목시켰다. 자수성가형 기업인의 특징인 '독불장군'식 경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다. 삼성그룹의 특징인 전문경영인을 영입해 책임경영을 시키는 경영철학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삼성상회에는 40여 명의 종업원이 근무했다. 사장-지배인-사무직'생산직 등으로 조직이 구분돼 이미 근대적 기업의 형태를 갖췄다. 호암의 유학시절 친구였던 이순근은 지배인으로 들어와 호암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삼성상회의 단기간 급성장에 큰 도움을 줬다.

삼성상회 창업 1년 만에 큰돈을 번 호암은 1939년 대구 조선양조를 인수, 소주'청주'막걸리뿐만 아니라 사이다까지 생산했다. 호암은 조선양조 역시 경영을 골고루 분산하는 방법으로 직원들에게 경영 책임을 맡겼다. 당시 대구의 유지 모임인 을유회(乙酉會)에서 알게 된 김재소를 조선양조 사장에, 지배인은 이창업, 공장장은 김재명을 앉혔다. 이들 전문 경영인들은 호암의 기대대로 조선양조의 '대박'을 이끌었고 호암은 대구에 온 지 1년여 만에 대구의 고액납세자로 올라섰다.

◆믿음은 믿음으로 돌아왔다

호암은 해방 직후 대구를 방문한 이승만 박사를 대구 유지 자격으로 만났다. 이승만 박사는 "서울에 오면 한번 들르라"고 당부했고 호암은 이 박사를 서울 이화장에서 만났다.

호암은 이 박사와의 만남 이후 '더 큰 꿈'을 꾸기 시작했고 삼성상회 창업 9년여 만인 1947년 5월 대구 생활을 완전히 청산, 서울로 사업 근거지를 옮겼다. 대구의 사업체는 모두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긴 채 그는 서울로 떠나, 1948년 무역업체인 삼성물산공사를 열었다. 홍콩'싱가포르 등에 오징어와 우뭇가사리 등을 수출하고 무명실을 수입하는 것부터 시작한 삼성물산공사는 차츰 폭을 넓혀 철판에서 재봉틀, 실 등에 이르기까지 수백 가지 물품을 수입했다. 불과 2년 만에 상공부 등록 무역업체 중 순이익 규모 1위에 올라섰다.

2년여 동안 동분서주하며 서울에서 사업터전을 닦은 때에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은 호암이 일궈놓은 것을 모두 빼앗아가 버렸다. 인천과 서울 용산 창고는 모두 털렸고, 그의 쉐보레 자동차는 남로당위원장인 박헌영의 차지가 돼버렸다. 그는 빈털터리가 됐다.

천신만고 끝에 피란길에 올라 대구로 왔다. 대구로 왔던 호암의 주머니는 완전히 비어 있었고 "신세를 좀 져야겠다"며 조선양조를 찾아갔다. 김재소 사장'이창업 지배인'김재명 공장장을 만난 호암은 그들이 꺼낸 말에 까무러칠 뻔했다.

"사장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3억원가량의 내부 유보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하시고 싶은 사업을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조선양조는 대구로 몰려든 피란민으로 인해 그야말로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을 정도였던 것이다.

호암은 호암자전에서 조선양조 경영진으로부터 받은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란으로 인심이 자못 황폐해진 때가 아닌가. 이렇게 정직하고 믿음직한 사람들이 세상에 또 있을까. 감동되어 가슴이 메었다."

호암은 오늘날 삼성은 이때 받은 조선양조 돈 3억원이 밑바탕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가 믿었던 전문 경영인들이 그의 믿음을 믿음으로 고스란히 보답해준 것이다.

그는 이 3억원을 들고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다시 세우면서 삼성그룹의 터전을 닦게 됐다.

◆기업은 사람이다

삼성상회 창업 초기부터 호암은 '사람'이 사업을 좌우한다고 확신했다. 그의 확신은 창업 초기부터 실제로 들어맞았고, 호암은 기업 규모를 키워나가면서 '인재 제일'의 경영이념을 더욱 큰 폭으로 실천해나갔다.

"내 일생을 통하여 80%는 인재를 모으고 교육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다. 1년의 계(計)는 곡물을 심는 데 있고, 10년의 계는 나무를 심는데 있으며, 100년의 계는 사람을 심는 데 있다." (삼성 50년사 중에서)

호암은 1957년 당시 국내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원공채를 했다. 영하 15℃의 강추위가 몰아닥친 그해 1월 30일,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있던 서울대 상과대학 강당에서 삼성의 사원공채 첫 시험이 있었다. 2천여 명의 응시생이 몰렸다. 호암은 신입사원 채용 면접에 직접 참여했고 이때 공채된 제1기생 27명 중 5명이 전문경영자로서 삼성 계열사 사장직까지 올랐다.

일자리가 턱없이 모자라던 시절, 공채 과정에서 친인척 등 수많은 채용 청탁이 있었지만 그는 외면했다. 그는 훗날 언론 인터뷰(1985년 4월 22일)를 통해 "친척들 중에 자리 하나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었다. 친척 잔뜩 들여놓은 회사치고 변변한 곳은 없다. 이때부터 혈연'지연'학연을 배제하고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쓴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했다.

호암은 여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특출한 사람보다는 성실한 사람이 좋다"고 했다. 그는 성실한 사람을 뽑기 위해 노력했고 성실한 사람으로 키워내기 위해 직원들의 교육을 특히 강조했다. 1977년 1월 국내 처음으로 연수원 문을 연 것은 호암의 '직원교육'에 대한 열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아무리 유능한 사원을 채용해도 입사 후에 지도가 나쁘면 소용이 없다. 가지고 있는 능력에 상응하는 장소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으면 어느 사이엔가 진취의 기상을 잃고 무능 사원의 길로 떨어지고 만다. 입사 때는 그만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더라도 적절한 지도와 적소를 얻으면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1977년 6월 17일 삼성중공업 창원공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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