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건축계획의 과정(process)과 최종 목적(purpose)에 대해 학생들에게 과제를 내면 많은 학생들이 정작 건축의 이유와 조건에 대해선 소홀하고, 흔히 일컫는 외형 디자인에만 집중한다. 전공학생들의 생각이 이 정도니 일반이 가진 건축에 대한 오해는 당연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의 일반 디자인이 보거나 만져보는 외형에 국한된다면, 건축 디자인은 외형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간의 시선과 행태, 사고를 조절하고 계량하는 방식으로 공간의 내부가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건축디자인과 일반 제품디자인이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건축을 우리는 인간의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로 자주 설명한다. 그릇의 내부 즉 비워진 공간의 형상에 따라 변하게 되는 사물의 모양과 공간에 영향을 받는 인간의 행동과 의식을 비유하고자 함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만든 건축이 결국 우리를 다시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 1960년 TIME 윈스턴 처칠)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조각화되거나 꾸며지는 외피의 조정 작업이 일반 제품 디자인이라면, 비워진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다양한 콘텐츠의 생성과 프로그램의 구축이 건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디자인을 매스(sculptural-mass) 디자인이라 부르는 것보다 볼륨(follows function-volume) 디자인이라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특별히 눈에 띄고 별난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단정하지 않듯이, 특이한 형상의 건축 또한 무조건 좋은 건축으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건축은 비싼 재료가 충분조건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좋은 것이라 해서 꼭 비싼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축디자인스튜디오라는 설계 프로그램은 위와 같은 논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욕구와 건축적 기회를 동시에 부여했다.
"사물을 억지로 아름답게 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그것은 총체적 논점을 흐리게 하는 최면술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아름다움이 하룻밤 사이에 창조된다고 믿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고대적 처음'부터 시발되어야 한다. -중략- 그것은 불확실한, 그러나 섬뜩한 비례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대단히 아름답다. 그것은 시작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Louis I. Kahn: IN The Realm Architecture, Rizzoli, 1991)
건축 부지는 10m의 높이 차를 가진 24m 폭의 대지로, 북쪽과 서쪽으로 열린 비교적 완만하게 느껴지는 경사지였다. 건축의 배치는 기존 공대 2호관의 수평 연장선과 경사를 가진 부지의 자연 흐름에 순응하도록 계획되었다. 공대 2호관의 기존 수평축선은 본 건축물의 장래 수직증축의 기준이 되었고, 경사지의 흐름은 테라스형 스튜디오의 배치 기준선으로 이용되었다. 여기서 도입되어진 축(axis)선들은 평면 속에 만들어진 선큰가든(sunken garden)과 삼각형 포켓정원의 근거가 되며, 이들은 북향의 스튜디오가 가진 빛, 열, 환기 등 환경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로 계획되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두 개의 사선적 흐름과 팽팽한 긴장감은 건축을 지탱하는 엄격한 질서로 구축되었으며, 서로 건너보며 움직이는 복도의 이동은 시점교차를 통한 서로의 즐거움으로 형성되었다. 각각의 스튜디오들은 가장 단순한 구조체계 속에서 오롯이 비워졌고, 간소하게 다듬어진 투명한 창으론 계절의 변화무쌍함이 가감 없이 투영되길 바랐다. 대지의 경사를 이용한 스튜디오 앞의 테라스는 바람과 비와 햇살이 고스란히 학생들의 정서와 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도구로 실현되길 원했다. 다양성 다의성이 극대화되고, 행위의 자율성이 최대한 수용되는, 융통성의 확보가 디자인스튜디오에선 매우 중요한 요건이다. 이 융통성은 사용 구성원의 자율적 선택을 보장하고 오히려 부추겨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지가 가진 자연의 조건과 운영을 위한 프로그램이 건축의 모든 것이다. 아무런 장식도 어떤 제스처도 엄격하게 억제되었고, 프로그램이 건축의 구조이고, 또 그 구조가 건축의 디자인이 되길 바랐다.
좋은 건축의 조건은 '뭘 닮았나?'가 아니라 '뭘 담았나?' 즉 그 속에서 가동되는 프로그램과 콘텐츠가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또 건축에서도 생산과 소비라는 시장에서 형성되는 가치 선별기준이, 좋은 건축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되는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글=김홍근 ADF건축 건축학박사
사진=건축사진작가 박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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