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욱수천 산책을 하면서

문 차 숙
문 차 숙

마음이 따스한 사람과 이른 아침 산책을 했다. 아직 산으로 올라가지 못한 안개가 하얗게 덮고 있는 욱수천을 나란히 걸었다.

콘크리트 다릿발 아래로 인위적이긴 하지만 듬성듬성 징검다리가 놓여 있어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남들이 보면 주책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때처럼 깡충깡충 건너뛰면서 좋아했다. 종아리가 잠길 듯 말 듯 정도의 시냇물이 자갈을 씻으며 졸졸졸 흘러갈 때 나도 물길 따라 자꾸자꾸 걸었다.

우리는 너무 행복하다. 이 삭막한 잿빛 도회지 한 자락에 깨끗하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다니 꿈만 같다. 송사리 떼가 노니는지 햇살을 받은 은빛 물결이 일렁일 때는 맨발로 첨벙첨벙 건너고 싶었다. 맞은편에서는 희끗희끗한 노부부가 벌써 반환점을 돌아오는데 내게는 아직 저때가 먼 줄 알고 있다. 마음이 동한 사람과 따스한 눈빛을 오래 나누지 못해 아쉬웠던 그간의 시간을 채우면서 걷는 욱수천 산책길. 장난감 같은 낡은 기차가 찰가닥찰가닥 정적을 깨며 작은 다리를 지나가고 쪼르륵 물소리와 산비둘기와 함께한 산책길에 우리는 추억을 심었다.

말이 통하는 사람과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를 나누면서 한참이나 걷다 보니 키 큰 접시꽃이 언덕을 가로막고 서 있는 강둑에 닿았다. 금호강 가까지 닿을 동안 시간의 흐름을 눈치 채지 못하고 하염없이 걸었던 것이다.

금호강, 앞산과 뒷산을 장대로 걸친다는 순 산골에서 자란 내게 강은 신비롭고 미지의 세계였다. 아주 오래전 낙동강 가에 소풍을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은 모두 장기자랑과 보물찾기 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 나는 사막처럼 넓게 펼쳐진 하얀 모래밭에서 혼자 두꺼비집을 짓고 모래 위에 수없이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그러다 심심하면 강가에 앉아 수양버들 이파리 똑똑 강물에 뿌리면서 마음은 한없이 물결 따라 일렁이며 공상에 젖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강'이나 '강물'에 대한 시를 많이 썼으며 지금도 강가에 자주 간다. 강은 거만하지 않으면서 항상 잔잔하며 평화로웠다. 바람이 불어도 그다지 풍랑일지 않고 작은 시냇물을 모아 바다로 날라 주면서도 생색내지 않고 언제나 말이 없었다. 그런 강가에 오늘 아침 산책길,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도달해 버렸다.

지난겨울의 마른 쑥대가 파랗게 여름을 맞이하고 있는 아침 산책길은 시골 고향을 도시의 한 모퉁이에 옮겨 놓은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멋진 곳이 많지만 평소에 보지 못하고 지나친다. 무엇이든지 마음으로 자세히 보면 아름다운 것이 수도 없이 많은데도 늘 멀리서 찾으려 했다. 가까이에서 자주 보는 것에는 신비로움을 알지 못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연이나 사람이나 자주 만나면서 정을 내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아, 매사에 그랬다. 내 안의 보석을 두고 남의 장신구나 탐하면서 헛되이 보냈다는 것을 욱수천 산책을 하면서 알았다.

문차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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