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던 주말, 교육 선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서로 간의 안부를 묻고 나면 자연스레 학교 이야기가 나온다. 몇 년 전 퇴직한 Y교사가 새내기 시절 근무했던 시골학교 동창회에 초대받은 이야기를 꺼냈고, 이날 제자 자랑이 화두가 되었다.
나에게도 너무나 잊지 못할 제자들이 있다. 20대 후반 대구 어느 초등학교 4학년 담임할 때였다. 나는 둘째를 임신하여 그해 9월부터 한 달간 출산휴가를 하고 10월 초에 출근했다. 11월에는 학교 계획에 의해 수업 발표가 있어 마음의 부담이 컸다. 수업 준비를 하느라 일요일 밤을 새워 교재 연구를 하고 월요일 아침에 몽롱한 정신으로 출근을 하였다.
교문에 들어서는 순간, 아이들이 왁자지껄 뛰놀아야 할 운동장에는 아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운동장의 시계탑은 이미 9시 30분, 첫째 시간 수업이 절반을 지난 시간이었다. 3층 교실까지 정신없이 뛰었다. 죄 지은 마음으로 교실에 들어서니, 회장과 부회장이 나서서 자습문제를 풀며 학습이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너희들 정말 장하다!"라고 칭찬을 하니 "선생님, 걱정 마세요. 방송조회도 우리끼리 다 했어요"라며 나름 한마디씩 거들었다.
3일 후 수업 발표 날, '귀순해 온 공산군 비행사'라는 도덕과 수업이 순조로이 진행되어 드디어 정리 단계, 아이들과의 질의응답을 거의 마칠 때쯤에 학구파 K가 "지금 현재 남한에서 활동하는 간첩의 수는 몇 명이나 됩니까?"라고 물었다. 아뿔싸! 그 수를 대충 얼버무려 답을 하니 K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참관하신 선생님들이 나가신 후, 앞으로 나오더니 "선생님, 현재 우리나라의 간첩 수가 여기에…" 하며 신문 조각을 내밀었다. 나는 그저 무릎을 탁 칠 수밖에. 누구도 짐작 못 할 많은 수였다. 어린 마음에도 스승의 체면을 살리려고 참아 주었던 것이다.
만약 요즈음 4학년 아이들이라면 어떠할까? 위기에 처해도 놀라운 기지를 발휘할 줄 알던 그때 그 아이들! 그 해답을 교육환경에서 찾아보고 싶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아이들이 방과 후에 교실 환경도 교사와 머리 맞대어 꾸미고, 정원의 꽃도 가꾸면서 배려와 융통성을 배웠고, 친구들과 부대끼면서 지혜를 깨우쳤다.
부모의 교육열이 학교 교육만으로는 부족해서 학교 밖 어딘가에서 쉴 틈 없이 지식만 채우느라 하루를 소진하는 지금의 아이들이 안쓰럽다. 머리 한구석을 비워두어야 지혜도 담고, 창의도 담고 추억도 담을 것 아니겠는가. 어쩌면 어른의 '덜 관심'이 아이들에게는 '더 관심'으로 작용할 수 있다. 늘 스승을 앞지르던 제자들이 사회의 요소요소에서 그들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을 것이다. 창밖의 하늘빛이 그야말로 쪽빛이다. 내일은 저 쪽빛보다 더 푸른 하늘을 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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