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태맹의 시와함께]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올까?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올까?

-맹문재 (1963~ )

나는 여전히 서점에서 혁명의 책들을 골라 오지만

읽지 않는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재미를 들여서도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에 몰두해서도 아니다

나는 화투에 중독된 노름꾼처럼 시간을 뒤적이느라

책을 읽지 않는 것이다

시간에 빠진 나는

시간을 보고 시간을 듣고 시간을 추종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도 시간은 온화한 목소리로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림자만큼 제자리를 지키라고

불행을 예방주사처럼 맞으라고

내게 기도하듯 들려준다

나는 시간의 당부를 들을 때마다

역정조차 못 내는 진폐 환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팽개친 책을 잡는다

그렇지만 시간의 얼굴이 호수보다 넓고 부드러워

또다시 포기하고 만다

칼끝처럼 서 있던 나의 고집은

배부른 아기처럼 잠드는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혁명의 책들을 골라 올 것인가?

(전문. 『사과를 내밀다』. 실천문학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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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서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이 무엇이기에 우리는 시간에 중독되고, 시간을 추종하고, 시간의 얼굴을 호수처럼 넓고 부드럽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시간이란 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연속으로서의 역사이며, 순환하는 증명이며, 우리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한없이 넓은 이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념,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지금 여기 진리의 장소가 되고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혹, 그 시간이란 것이 결국은 '노예의 시간'은 아닐까? 가끔은 '혁명의 책'을 빼어들지만 읽지도 않은 채 우리 '배부른 아기처럼 잠드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마치 깨달음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나 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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