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수승화강(水昇火降)

지난 2014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미생'을 뒤늦게 접했다. VOD를 통해 20부작을 한꺼번에 몰아보니 이만저만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드라마를 통해 취업 준비생들의 모습과 인턴, 비정규직, 정규직의 생생한 모습들을 보면서 흥미로운 점들을 느끼게 됐다. '미생'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힘든 취업을 준비하면서 마음고생이 많았던 딸아이가 고생 끝에 원하던 직장에 취업을 하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미생' 15부에서는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 바둑 용어가 나온다. 수승화강은 '물은 위로, 불은 아래로'라는 의미로 본래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용어다. 차가운 기운은 올라가게 하고 뜨거운 기운은 내려가게 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한의학의 원리 중 하나다. 바둑에서는 중요한 승부처에서 '머리는 냉정하되, 반드시 이기겠다는 각오로 열기를 가슴에 품고 포기하면 안 된다'고 해석된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는 머리로는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되, 가슴은 따뜻한 인간미와 열정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병원에서도 이 말은 적용된다. '독수리의 눈과 사자의 심장, 여자의 손을 가져야 한다'는 영국 속담을 인용해 '예리한 독수리의 눈과 담대한 사자의 심장, 그리고 섬세한 여자의 손'이 훌륭한 외과 의사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즉, 의사는 정확한 진단을 할 수 있는 경험을 가져야 하며 대담하고 강인하며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 동시에, 부드럽고 친절하며 사려 깊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수승화강'이라는 말은 회사뿐만 아니라 병원 그리고 모든 생활 전반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 삶이 수승화강의 정신으로 살아가면 참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일상 탓에 판단력은 둔화되고, 열정은 식으며 인간애는 희미해진다. 사명의식마저 둔감해지는 것을 느끼면 안타깝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가정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가 이와 같은 문제로 시끄럽다. 가정에서는 자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아니라, 부모의 대리만족의 한 방편으로 사교육 과잉 등 부작용을 낳고 있다. 반대로 아동학대가 빈발하는 것을 보면 비이성적인 인간미의 부재가 비극을 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승화강의 정신을 갖는다면 이런 현상들이 줄고 더욱 좋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다짐했던 수승화강의 정신이 희미해지는 2월이다. 나 자신부터 다시 한 번 가슴을 모아 냉철하게 생각하며, 뜨거운 열정을 갖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인간미로 내 가정을 돌아보며 매일 만나는 동료와 환자들을 돌볼 수 있게 되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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