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연설문의 지적소유권

히틀러와 처칠의 공통점은? 탁월한 연설 솜씨를 지녔고 연설문도 직접 작성했다는 점이다. 최고의 히틀러 연구자인 이언 커쇼에 따르면 히틀러는 비서의 도움 없이 연설문을 혼자 썼는 데 만족할 만한 문장이 나올 때까지 며칠을 밤늦게까지 방에 틀어박혀 몰두했다고 한다. 히틀러가 불러주는 내용을 3명의 비서가 타자기로 치면 히틀러는 그것을 다시 꼼꼼하게 손질했다.

처칠도 언제나 홀로 연설문을 썼는데 주로 침대 위에서였다. 그 과정이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그는 "말이 독수리처럼 머리 위로 뱅뱅 돌기만 하는군"이라며 자주 투덜댔다고 한다. 이런 산고(産苦) 끝에 나온 연설문은 하나같이 명문장이었다. 그 토대는 엄청난 노력이었다. 처칠은 선천적 말더듬이에다 학습 지진아였으나, 명문장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를 베껴 쓰며 표현력을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정치 지도자는 보통 연설문을 담당 비서에게 맡긴다. 타고난 문장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 이런 시스템은 효율적이긴 하지만 연설문이 유명해지면 '지적소유권'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는 문제가 있다.

2002년 부시 미국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등장한 '악의 축'(Axis of Evil)이 그렇다.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테러지원국을 지칭한 이 표현은 당초에는 '증오의 축'(Axis of Hatred)이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이탈리아'일본을 가리키는 '추축국'(Axis Powers)에서 따온 것으로, 부시의 연설문 담당 데이비드 프럼의 작품이었다.

이것이 '악의 축'으로 바뀐 것은 더 '신학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세계를 선과 악의 투쟁으로 보는 부시 대통령의 보수적 개신교 세계관을 감안하면 이해가 간다. 문제는 이 표현이 공동작업의 결실인데도 당시 백악관 연설문담당팀장인 마이클 거슨이 자기가 만든 것처럼 행세했다는 점이다. 그러자 팀원들은 거슨이 이 표현에 전혀 기여한 바 없다며 비난했다. 이에 대해 거슨은 딱 부러지게 부정하지 않았다.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문을 손질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확인됐다. 과문(寡聞)한 탓인지 최 씨가 그렇게 글을 잘 쓰는지는 몰랐다. 여기서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다. 혹시라도 먼 훗날 박 대통령의 연설문이 명문장의 반열에 오르면 최 씨는 가만히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내가 쓴 거야"하고 나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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