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신뢰의 조건

"긴 인생에서 제가 터득한 커다란 교훈은, 한 인간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또한 한 인간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불신하는 것입니다."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헨리 스팀슨 육군장관이 1945년 9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원자폭탄 통제를 위한 조치 제안'이란 메모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인간'은 스탈린이다. 스탈린은 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억지처럼 들리는 이런 제안을 스팀슨이 한 이유는 미국의 '핵 독점'이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고, 공동관리로 통제하지 않으면 미소 간 핵무장 경쟁은 필사적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계 적화라는 목표를 향해 질풍처럼 동유럽을 공산화해가던 스탈린의 행보는 원자폭탄 공동관리의 주체로서 스탈린을 신뢰할 수 없게 했다.

공동관리는 바로 원자폭탄의 비밀을 공유하는 것이고, 이는 스탈린에게 원자폭탄을 거저 안기는 것이었다. 이미 재래식 전력에서 서방을 압도하는 소련이 원자폭탄까지 갖게 되는 것은 미국에 악몽이었다. 독소전에서 독일군이 깔아놓은 지뢰의 신속한 제거를 위해 자국 병사들을 지뢰밭으로 걸어가게 할 만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게 소련인 만큼 신속한 세계 적화를 위해 소련이 원자폭탄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이 미국의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결국 스팀슨의 공동관리 방안은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털 등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됐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스팀슨의 제안이 채택됐다면 미소 간 군비경쟁은 '필사적'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거꾸로 스팀슨의 구상이 무산됐기 때문에 미국은 일관된 대(對)소련 핵 우위 전략을 통해 냉전에서 소련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확실하지 않으면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판문점 회담'에서 보여줬다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믿음은 위험하다. '비핵화'는 여전히 '말'의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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