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18 시니어문학상] 대상- 논픽션 '뒤로의 여행'/ (삶은 주문을 외우며 헤쳐 나가는 가시덤불)

김영관(74·대구시 수성구)

그날 이후 체험으로 조금씩 깨달아갔다. 엄마가 푸성귀 가득 담은 함지박을 머리에 얹고 하루 두 번 읍내 십 리 장을 갔다 와야 보리밥을 먹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엄마의 손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손톱은 문드러지고 까만 얼굴 가득 주름은 나날이 깊어졌다. 허리는 수태골 비탈밭 잡초가 휘어잡아 초승달을 닮아갔다. 그 허리로 깨밭에서 긴긴 여름 해와 씨름 할 때 하얀 깨꽃이 무리 지어 위로했지만, 엄마의 신음 한숨은 깊어만 갔다. 보리가 패기 시작하면 우리 집은 때를 걸려야 할 때가 다반사였다.

초등학교 삼학년 초여름이었다. 하교 시에 내일 도시락을 싸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나와 반 친구들은 환호했다. 선생님은 야외 교장인 뫼 등에서 도시락을 먹을 거라고 설명해주셨다. 당시 6, 25전쟁으로 학교 본 건물은 군인들이 막사로 쓰고 우린 공동묘지 옆 산자락에 다닥다닥 지은 판자 교실에서 수업할 때였다.

책 보따리를 풀어 마루에 던지고 저수지 위 골짜기 끝에 있는 우리 밭으로 뛰었다. “엄마……,엄마.” 콩밭에서 유월의 뙤약볕을 휜 등줄기로 받아내던 엄마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당했다.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세상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나는 엄마 앞에 턱 버티고 서며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내일 도시락 싸 오래 도시락” 그제 서야 엄마는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곤 칭얼대는 동생을 내 등에 올려주며 힘없이 말했다.

“동생 업어 재우고 책 좀 읽어라.”

난 잠을 설쳐 꿈도 꾸지 못했다. 타다…… 타. 아궁이 불 지피는 소리에 부엌 봉창 문을 밀었다. 엄마가 도시락 싸는 걸 보고 싶었다. 문턱에 턱을 괴고 기다리길 한참 까만 솥뚜껑이 열리고 하얀 김이 솟아오르자 풍기는 냄새에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느 밥 냄새와는 달랐다. 구수하고 달콤했다. 솥을 들여다봤다. 이 밥이 누런 보리밥 한가운데 보석처럼 빤짝이고 있었다. 그 시절 이밥은 조상제사 때나 명절 때 어쩌다 맛보는 밥이었다. 엄마는 내 도시락에 이밥을 담고 남은 보리밥으로 밥그릇 네 개를 채우자 솥엔 더는 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린 사형제였다. 엄마는 솥에 물을 부어 나무 주걱으로 휙휙 저어 멀건 숭늉으로 엄마 밥그릇을 채웠다. 아침 밥상에서 엄마는 숭늉 그릇에서 사금 고르듯 보리 밥알 건져 올려 숟가락 꽁무니로 날된장을 찍어 오물거리며 허겁지겁 밥 먹는 우리를 쳐다보는 눈빛이 애잔했다.

나는 계란 반숙이 얹어진 도시락을 책 보따리에 싸며 오직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까먹을 생각만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산 고개를 넘으며 나는 깡충깡충 신나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깨달았다. 그날 엄마는 한 술도 뜨지 못한 빈 가마니 배로 산비탈 밭에서 긴긴 여름 해를 서산으로 밀어 넘긴 고난(苦難)을, 나의 그 추억은 가슴속 멍울이 되어 세월 따라 커져만 갔다.

이어지는 영상은 동짓날이었다. 밀기울 수제비로 배를 채우고 잠을 잤다. 으스스함에 잠이 깼다. 얇은 이불로 몸을 말아 문풍지 틈새로 들어오는 얼음 바람을 막으며 코를 골고 있어야 할 엄마가 없었다. 나는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귀를 쫑긋거렸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들렸다 끊어지길 반복했다. 이불을 어깨에 걸치고 방문 앞으로 기어갔다. 황소바람 드나드는 문틈에 외눈을 박고 밖을 내다봤다.

엄마였다. 희뿌연 달빛 아래 장독대 뚜껑 위에 팥죽 한 그릇과 정한 수 한 사발을 올려놓고 초승달 허리를 활처럼 휘었다가 펴기를 반복하며 두 손을 비비고 있었다. 아마도 정한 수는 꼭두새벽에 아랫마을 가는 길 언덕 아래에 있는 우물에서 떠온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팥죽은 봄부터 여름내 싸리나무 울타리에서 키운 팥 한 종지를 엄마만이 아는 장소에 보관해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자식들 무병장수하게 하여주시고, 세끼 밥 따뜻하게 먹게 하여주시고, 많이 배우게 해주시고.” 엄마는 차가운 새벽바람과 맞서며 자식들만은 어둠보다 더 까만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머리에 하얀 이슬이 방울방울 맺히고 있었다. 아랫마을에서 닭 우는 소리가 찬 공기를 가르며 달려오고, 옆집에서 쇠죽 끓이는 시큼한 내음이 담장을 넘어 내 코로 들어왔다. 나도 빌었다. 엄마의 시린 손이, 휜 허리가, 굳어지기 전에 기도가 끝나기를,……

그날의 그 기억은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동지는 나에겐 특별한 날이 되었다. 동지가 다가오면 아내가 묻는다.

“올해도 팥죽을 끓여야 하느냐고?” 나는 가슴속 멍울을 만지며 고개를 끄떡인다. 아내가 다시 따지듯 되묻는다. “팥죽 먹을 거냐고,” 나는 또 고개만 끄떡인다. 아내는 입을 삐죽거리며 팥을 팍팍 힘주어 씻었다. 내가 팥죽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며칠 동안 팥죽을 먹어야 하는 아내로선 팥죽 끓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지사였다. 나는 매년 동짓날에는 어김없이 아내의 불만을 흘려들으며 아내가 팥죽을 끊이는 동안 나 혼자의 기도는 길고 간절해졌다.

다음으로 풀려나온 기억 필름은 화장실 청소 당번이었다. 초등학교 사학년 가을이었다. 종례 종이 울리자마자 나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은 지저분했다. 청소에 필요한 물도 교실 세 개를 지나쳐 가야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압감을 주는 건 청소 후 선생님의 검사를 받아야 집에 갈 수 있었다.

숨 가쁘게 청소를 끝냈다.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서산 위에서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낮에도 귀신 나온다는 공동묘지를 지나 산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했다. 기다리는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나오시지 않았다. 나는 안절부절 교무실 앞까지 갔다 되돌아오기를 몇 번 그러다 생각했다. 어두운 밤에 홀로 공동묘지와 산 고개를 넘는 것과 교무실 문을 미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무서운지,…… 그래도 밤중에 공동묘지와 산을 넘는 것이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았다. 교무실 문을 열고 주뼛주뼛 거리며 선생님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서야 선생님은 생각났다는 듯 집에 가라는 손짓을 했다.

학교를 벗어나자 노을 속으로 어둠의 띠가 사바나 강을 향해 가는 누우 무리처럼 길게 얼룩지고 있었다. 웅긋쭝긋 솟아있는 공동묘지를 지나면서부터 나는 울음과 숨을 동시에 턱에 걸었다. 어스름한 묘 사이사이에서 근방이라도 도깨비 불빛이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갈 것 같았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동생들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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