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제2의 광주 폭행 사건은 없어져야 합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50대 부부가 20대 청년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구타당했는데도 경찰이 '쌍방폭행' 혐의로 사건을 처리했다는 내용이었다. 억울함을 호소한 이 청원은 부부가 폭행당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편집된 영상과 함께 삽시간에 온라인을 달궜다. 청원 동의자 수도 급속도로 솟구쳤다.
그러나 경찰이 사건 당시 상황을 담은 47분 분량의 CCTV 영상 전체를 공개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됐다. 동영상에는 20대 청년들과 50대 부부가 실랑이를 벌이다가 부인이 먼저 한 청년의 뺨을 때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서로 뺨을 후려치거나 주먹질을 하는 장면도 이어졌다.
이후 동의는 3만7천 명에서 멈춰섰다. 오히려 글을 올린 이를 무고죄로 처벌하라는 청원까지 등장했다. 논란은 잦아들었지만 양측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집단 폭행범으로 몰렸던 청년들은 글을 올린 부부의 가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50대 부부 폭행 논란이 벌어진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또 다른 국민청원이 지역을 달구고 있다. 집단 성폭행을 당한 중학생 딸이 가해자들에게 2차 피해까지 당하고 있다며 엄벌에 처해 달라는 청원이다.
이 청원은 5일 현재 청원자 수가 23만 명을 넘어섰다. 가해자 6명 중 3명은 만 14세 미만의 '촉법소년'이고, 3명은 만 18세 미만의 미성년자인 상황. 3명은 이미 소년부로 송치돼 재판을 받았고, 3명은 6일 2차 공판을 앞두고 있다. 형사미성년자인 가해자들이 성인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문재인 정부가 선보인 '히트작'으로 꼽힌다. '20만 명의 동의가 모이면 청와대가 직접 답변한다'는 약속은 시민들의 참여의식을 절묘하게 자극했다. 시민들은 온라인 광장에서 직접 여론을 생산, 형성하며 해결까지 이끌어낸다.
대구 최대 사설 유기동물 보호소인 '한나네 보호소' 폐쇄 문제가 대표적이다. 250여 마리의 유기동물이 살고 있는 이곳은 주민들의 민원과 가축분뇨법 위반 소지로 폐쇄 위기에 몰렸다. 그러나 국민청원을 통해 여론의 중심에 섰고, 동물보호시설은 축사 등과 다르다는 유권해석을 이끌어내며 벼랑 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들이 모두 화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역과 관련된 청원들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청와대의 답변까지 끌어냈다. 국민청원이 제기된 후, 언론이나 SNS를 통해 유통에 용이한 '미디어콘텐츠'로 바뀌었다. 이 콘텐츠는 다른 매체나 SNS를 통해 재가공돼 여론의 관심을 받았다. 뜨거워진 여론은 청원 동의자 수를 늘렸고, 눈덩이 굴리듯 확대됐다. 이 과정 중 핵심은 번데기가 성충으로 변하는 '우화'(羽化), 즉 미디어콘텐츠화였다.
다양한 의견은 민주주의의 근간이지만, 비효율적이라는 부작용도 동반한다. 5일 오후 5시 현재 게시판에 오른 전체 청원 숫자는 22만9천 개가 넘는다. 매일 수십여 개씩 쏟아지는 국민청원의 홍수 속에서 중요한 정책 제안이나 애끊는 호소는 저열한 악담에 밀려나기 일쑤다.
광장은 민주주의가 꽃피는 너른 밭이다. 그러나 광장에도 나름의 질서가 필요하다. 광장을 떠도는 무분별한 증오는 걷어내야 한다. 국민청원은 분명 효능이 뛰어난 즉효약이지만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모든 환자가 대학병원으로 몰려서는 안 된다. 질환의 경중과 종류에 따라 동네의원부터 2차병원, 상급종합병원으로 이어지듯 국가시스템도 적절한 '민원전달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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