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반핵 시위가 절정을 이룬 시기는 소련이 서유럽 전역을 사정거리에 두는 신형 중거리탄도미사일 SS-20을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에 배치한 데 대응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헬무트 슈미트 서독 총리의 제안에 따라 1979년 이른바 '이중결의'(dual track decision)를 채택한 뒤인 1980년대 초·중반이다.
이중결의란 소련과 협상해 SS-20의 철수를 이끌어내되 안되면 미국의 중거리 미사일 퍼싱Ⅱ를 서독에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서독 내 반핵·반전 단체들은 이에 격렬한 시위로 맞섰다. 1981년 6월 20일 함부르크에서 8만여 명이 참가한 시위를 시작으로 1980년대 전반 내내 서독 전역은 반핵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
슈미트 총리의 사민당 주요 인사들도 이에 동조했다. 전 총리인 빌리 브란트는 슈미트 정부를 향해 퍼싱Ⅱ를 일방적으로 포기하라고 촉구했고, 브란트의 동방정책 기획자인 에곤 바는 슈미트 총리가 "동독을 협박하는 전쟁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비난했다. 이에 앞서 1980년 12월에는 사민당 의원 150여 명이 '이중결의'가 위험한 결정이라고 비판하는 이른바 '빌레펠트 선언'에 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핵·반전 단체들은 퍼싱Ⅱ 배치 결정의 원인인 SS-20의 서독 배치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그러면서 퍼싱Ⅱ는 소련을 참수하기 위한 선제공격 무기라는 주장만 반복했다. 소련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준 것이다. 이를 두고 만프레드 빌케 전 베를린자유대학 교수는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선(先)무장이라는 원인과 미국 미사일 배치라는 결과를 바꿔치기하는 데 성공했다"고 비판했다. 반핵·반전 단체들은 동독 공산당과 긴밀히 연계돼 있었던 것이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북한이 황해북도 비밀기지에서 단거리 미사일을 개발 중인 사실과 관련해 북한을 두둔하고 나서 '북한 대변인'이냐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의 말은 소련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준 1980년대 서독 반핵 단체들의 궤변을 빼다 박았다. 김 대변인은 우리 기업 총수들에 대한 리선권의 '냉면' 막말도 감싸기로 일관했다. 청와대가 언제부터 북한 대변인실이 됐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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