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덕현의 엔터인사이트] 지금 드라마들...개화기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중요해진 건

콘텐츠 개화기를 맞은 ‘미스터 션샤인’과 ‘녹두꽃’의 자세

최근 대중문화 콘텐츠들은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개화기를 새롭게 재조명하고 있다. 작년 방영됐던 '미스터 션샤인'이 그렇고 지금 방영되고 있는 '녹두꽃' 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런데 이들 작품들이 다루는 개화기는 과거와 뭐가 달라졌을까.

SBS
SBS '녹두꽃'

◆'녹두꽃'에 담긴 개화기의 풍경

최근 방영되고 있는 SBS 드라마 '녹두꽃'은 지금껏 사극이 좀체 다루지 않았던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이 벌어진 1894년은 갑오개혁이 일어났던 해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이 일제의 강압에 의해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지금껏 우리는 '갑오경장'이라 낮춰 불러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점이 우리네 역사에 있어서 근대로 넘어오는 기점이 됐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녹두꽃'은 그래서 근대의 시작점으로서 민중의 의식이 깨어나 봉기의 형태로 등장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건과 동시에, 일제에 의해 벌어졌지만 근대적 변화를 일으켰던 갑오개혁이라는 사건을 배다른 형제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한때는 '거시기'로 불리며 민초들을 괴롭히며 살다 전봉준(최무성)을 만나 동학군의 별동대장으로 거듭나는 백이강(조정석)이 전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그의 배다른 동생으로 일본 유학을 하며 문명의 힘을 실감하고 돌아왔지만 여전히 신분제 사회의 높은 장벽을 느끼고 '개화'라는 명목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백이현(윤시윤)이 후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개화를 소재로 이야기하는 백이현이라는 캐릭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드라마에서 그는 신분제 사회가 갖는 전근대적인 조선의 시스템에 절망한다. 양반이라는 이름으로 군림하고 농민들의 피고름을 짜내 제 배를 채우며, 양반이 아니면 세상에 나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현실에 부딪친다. 물론 그가 말하는 문명을 이 드라마는 더 극악한 '야만'이라 말하고 있다. 문명화를 이야기하며 사실은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는 일제가 그렇고, 거기에 자신을 파괴하듯 동조하는 백이현이 그렇다. 전봉준이나 송자인(한예리) 그리고 백이강은 그런 '문명의 야만'의 드러내는 백이현을 꾸짖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항상 근대가 열리는 과정에서 동학농민혁명을 의도적으로 도외시하다 보니 생겨난 '패배의식'을 '녹두꽃'은 이런 민중의식의 태동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신분제의 폐단을 깨기 위해 개화는 필요했지만 그것이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우리 스스로의 주체적인 근대화를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 드라마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민중의식의 태동을 통해 그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가 막연히 개화기 하면 떠올리는 망해가는 조선과 일제의 침탈의 풍경 속에 우리 스스로 깨어나고 있던 민중의식이 있었다는 걸 담아내는 것이다.

tvN
tvN '시카고 타자기'

◆개화기를 다양한 시각에서 다룬 드라마들

개화기는 사실 드라마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시기로 여겨져 온 바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방영됐던 KBS '경성스캔들'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 속에서의 혁명과 멜로를 다룬 드라마로 호평과 함께 만만찮은 반발도 일으켰던 작품이다. 사실 당시만 해도 일제강점기라는 시기는 일제와 구한말 조선의 대결구도가 반드시 다뤄져야 하는 어떤 시대상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드라마에 등장한 "네가 나한테 혁명이 뭔지 가르쳐 줘. 그럼 내가 너한테 사랑이 뭔지 가르쳐줄게." 같은 대사는 사실 당시에는 파격이었다. 혁명과 사랑이 같이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일제와 대결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루되 그들 역시 박제된 역사 속 인물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있는 한 사람들이었다는 걸 그려낸다. 그간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무게에 짓눌려 좀체 보여주지 못했던 당시 근대화가 변화시켜놓은 실제 대중들의 일상을 이 드라마는 외면하지 않는다. '모던걸'과 '댄스보이'가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살아나고 그들의 혁명이 사랑과 병치되었다.

이런 일제강점기의 이미지에 묶인 개화기의 풍경을 다양한 일상의 이야기들로 풀어내려 하는 시도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물론 전형적인 일제와 독립운동의 대결구도를 그린 KBS '각시탈' 같은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했지만, 2017년 '시카고 타자기'나 2018년 '미스터 션샤인'이 그리는 개화기 풍경은 암울했던 시대상과 더불어 개화가 가져온 낭만 또한 피어나는 시기로 재탄생했다. 판타지를 가진 타자기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전생과 후생이 엮어지는 '시카고 타자기'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를 현재의 관점으로 들여다보며 당대의 치열했던 청춘들의 저항과 사랑을 담아냈다. '미스터 션샤인'은 개화기 일제의 침탈에 들불처럼 일어났던 의병의 이야기를 그 시기에 탄생한 철도, 호텔, 거리, 빵집 등등의 풍경들 속에서 어우러졌던 남녀들의 이야기로 그려냈다.

tvN
tvN '미스터 션샤인'

◆콘텐츠 개화기, 우리에게 개화기 재조명이 중요한 이유

'시카고 타자기'나 '미스터 션샤인' 그리고 '녹두꽃'으로 이어지는 개화기의 재조명은 지금처럼 글로벌 콘텐츠의 시대가 일종의 '콘텐츠 개화기'를 요구하는 상황에 더더욱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로벌 콘텐츠 시대를 이끄는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플랫폼을 타고 이제 콘텐츠들은 국적과 언어의 경계가 무색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콘텐츠들이 시시각각 이편으로 유입되어 들어오고, 우리의 콘텐츠 또한 동시에 지구 반대편에 보며 열광한다.

최근 방영된 '아스달 연대기'가 시작과 함께 HBO '왕좌의 게임'과의 유사성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우리가 접하고 있는 글로벌 콘텐츠 세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간 물리적 장벽으로 나뉘어 있던 콘텐츠와 문화들은 이제 디지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장벽 없는 교류를 만들어내고 우리의 눈높이는 이미 글로벌 감수성에 닿아 있다. 19세기 말 개화기가 극한에 이른 신분사회의 끝에서 민중의식이 깨어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의 물리적 침탈에 의해 자행되었다면, 지금의 콘텐츠 개화기는 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네트워크를 통해 '무혈혁명'으로 이뤄지고 있다.

과연 이 콘텐츠 개화기에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지켜내면서 동시에 글로벌한 보편적 감성과 어우러지게 할 것인가. 우리의 문화가 갖는 고유성과 글로벌 문화가 갖는 보편성을 어떻게 균형 맞출 것인가. 지금 우리가 던지게 되는 이 질문은 사실상 19세기 말 개화기에도 이미 던져졌어야 하는 질문들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 것을 지켜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근대화의 새로운 물결을 어떻게 이뤄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 그것이 당시에도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간 미진했던 개화기라는 시기를 다루는 콘텐츠들이 이제 점점 많아지고, 당대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과 재조명이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그 시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반성하고 극복해내는가의 문제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콘텐츠 개화기에 어떤 열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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