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노의 시인 쇼팽(1810~1849)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여성이 한 명 있다. 작가 조르주 상드가 그 여인이다.
쇼팽과 상드는 1836년 한 파티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쇼팽은 젊은 연주자·작곡가로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였고, 상드 역시 프랑스 문단에서 잘 나가는 작가였다. 상드는 쇼팽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었고 인기도 많았다. 쇼팽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상드는 자유분방하고 사랑이 넘치는 진취적인 여자였다. 상드는 병약해 보이는 26살의 청년 음악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쇼팽은 남장을 하고 시가를 피우는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결국 집요한 상드의 애정 공세에 쇼팽은 굴복하고 만다.
폐결핵에 걸려 파혼의 아픔을 겪었던 쇼팽에게 상드는 구원의 여신이었다. 상드는 여리고 섬세한 쇼팽을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감쌌다. 그러나 유약한 천재 음악가와 나이 많은 여인의 열애를 바라보는 파리 사교계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요양도 할 겸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로 향했다. 이를테면 일종의 '밀월여행'이었다. 상드와 쇼팽은 마요르카 섬과 마르세유, 상드의 영지인 노앙의 저택 등에서 약 9년에 걸쳐 함께 살았다.

당시 쇼팽은 병세가 점차 악화되어가고 있었지만 강인한 생활력을 지닌 상드의 보살핌 속에서 수많은 명곡을 작곡했다. 그런 그에게 쇼팽은 '빗방울 전주곡'(Prelude)이라는 곡을 바치기도 했다.
하지만 쇼팽의 건강이 날로 악화 되면서 둘 사이가 점점 멀어져 갔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채 사랑했던 두 사람은 9년 만에 헤어진다. 상드와 헤어진 후 쇼팽의 병은 급속도로 나빠졌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쇼팽은 1848년 아픈 몸을 이끌고 영국 연주여행을 강행한다. 쇠약해진 쇼팽은 파리로 돌아와 이듬해 그의 여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상드는 쇼팽의 임종 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잡아 준 이는 상드의 딸 솔롱쥬였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유품 속에서 봉투 하나가 발견되었다. 겉봉에는 조르주 상드와 쇼팽의 이니셜인 G.F가 쓰여 있었고 봉투 안에는 상드의 머리카락 한 묶음이 들어 있었다. 상드와 헤어진 후에도 쇼팽은 상드를 한시라도 잊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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